대지에 물이 고인다. 당신은 어디로 갔나요. 나는 홀로 어둠속을 헤매는데 당신은 어디를 갔나요. 왜 나를 홀로 두나요. 무서워요. 왜 나는 홀로 이 길을 지나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요.
너에게 맹세할게. 나는 영원히 너만의 것.
아아, 인간의 맹세란 어찌 이다지도 허망한가. 아이에서 소녀로, 소녀에서 여인으로.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 여인은 허망히 구렁텅이로 처박혔다. 하늘의 위 모두가 찬양하고 선망하는 그 장소에서 대지의 저 끝, 모두가 경멸하고 욕하는 곳으로 굴러 떨어진 여인이 광소했다. 결국 너 또한 이곳에 처박힐 것이거늘. 여인은 사랑해마지않던 연인을 저주했다. 그러나 사랑했다. 여인은 눈물지었다. 너만큼은 이곳으로 굴러 떨어지지 않기를. 여인은 축복했다. 허나 외로운 것을 내 어찌 하리오. 여인은 어둠속에 앉아 스스로를 상처 입혔다. 연인의 행복을 축하하지만 동시에 저주했다. 여인은 스스로를 저주했다.
너를 사랑해.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일거야.
귀를 파고드는 과거의 속삭임이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오, 연인아. 넌 왜 이다지도 달콤한가. 차가운 대지에 몸을 의탁한 여인이 실소했다. 아아, 연인아. 너는 왜 나의 곁에 없는가. 시간은 흘러갔다. 과거로 거슬러 오르는 것은 오직 여인의 정신뿐. 그것마저도 온전치 못했다. 여인은 대지에 고개를 처박았다. 하늘을 보는 것조차 괴롭다. 여인은 그리 생각했다. 하늘 저 위에서 바라보는 대지는 아름답기 그지없었거늘, 떨어져 밟고선 대지는 차갑고 잔혹했다. 한없이 포근한 어머니의 품과도 같으리라 생각한 대지는 날카로운 이빨을 드밀었다. 여인은 몸을 웅크렸다.
너를 사랑해. 이것만은 변치 않을 거야.
여인은 사납게 귀를 할퀴었다. 귓가에 끝없이 울려 퍼지는 연인의 목소리가 괴롭기 그지없었다. 왜 당신은 나를 놓아주지 않는가. 여인은 홀로 소리 질렀다. 왜, 왜, 왜. 끝없이 반복될 뿐인 외침은 여인의 입속에서 처절하게 부서졌다. 사랑을 갈구한 것이 그토록 큰 죄였던가. 여인의 한서린 외침은 소리가 되지 못하고 부서졌다. 대지가 탐욕스레 여인의 온기를 빼앗았다. 지나가던 바람이 잔혹하게 여인을 스치었다. 홀로 우는 여인의 목소리가 구슬펐다. 아프다. 여인의 홀로 되뇌이는 말이 먹먹하게 울렸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그들의 가차 없는 사랑이 여인을 덮었다.
너는 영원히 나의 것. 나는 영원히 당신의 것. 약속해.
남자는 한 장의 사진을 쓰다듬었다. 사랑스러웠던 연인. 아이에서 소년으로, 소년에서 남자로.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 남자는 모든 것을 바쳐 그녀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녀의 추락은 한 순간. 모두가 손가락질 하는 행동을 단 한번 했다는 이유로 세상은 그녀를 하늘 저 높은 곳에서 대지 저 깊은 곳으로 끌어내렸다. 남자는 그렇다 할지라도 여인을 사랑했다. 그러나 남자는 지키지 못했다. 그에게 있어, 그녀는 지켜야하는 대상이었다. 그는 자신의 위치를 잘 알았다. 그가 가면 그녀를 지킬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더욱 상처 입었으리라. 세상은 그토록 잔인했다.
남자가 떠난 자리. 한없이 빛났지만 또한 어두웠던 일생을 살다간 여인의 무덤가에 검은 장미가 홀로 자리를 지켰다.
슬프고도 비극적인 그들의 사랑.
그러나 영원히 함께하리라는 맹세를 담은 그들의 사랑.
남자의 마지막 숨결은 그녀와 함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