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것을 움켜쥔 시간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흘러간다. 그리고 그 속에서 수많은 감정이 싹트고 자라나고 살아간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도,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도, 누군가를 이기고자하는 마음도. 인간의 마음은 빛과도 같이 밝으며 어둠과도 같이 어두우며 새벽과 황혼과도 같이 애매모호 하기도 하다. 그중에 사랑이 있다. 혹자는 그것을 영원한 언약이라 하기도 하고, 한순간의 몽상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변치않는 한가지 사실은 어떤식으로든 그것은 일어나고 또 잊혀지는 일들 중 하나라는 것이다. 모든 것을 지배하는 필연적이고도 초월적인 힘, 운명. 그것이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든, 혹자의 망상의 결과이든 그것의 힘은, 그것의 존재감은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다.
아주 오랫동안 병실에 앉아있던 소녀가 있었다. 그리고 늘 소녀의 곁에 있던 인형이 있었다. 소녀의 손끝으로부터 태어난 작은 인형은 소년의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소녀의 세상은 한숨이 나올정도로 작았다. 잠에서 일어나고 또다시 잠속으로 빠져드는 순간까지 소녀의 세상은 병실, 혹은 병원에 한정되어 있었다. 무슨 일인지, 또 어째서인지 알 수 없지만 턱없이 약한 소녀의 신체는 소녀를 병원밖으로 나가게해주지 않았다. 소녀의 가족은 소녀가 건강해질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일을 했다. 언젠가, 어느날 소녀가 병원밖의 세상으로 나와 그들과 시간을 공유하기를. 그것만이 그들의 소망이요, 바람이었다. 어찌되었든, 소녀는 혼자였다. 가족은 바빴고 병원의 사람들은 바빴다. 소녀가 아니라도 죽음을 목전에 둔 이들은 많았고, 소녀는 건강한 축에 드는 환자였다. 그래서 소녀는 소년을, 자신과 함께 해줄 인형을 만들었다.
인형은 처음부터 인형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인형은 소년이었다. 소녀의 곁에 있던 소년. 소녀와 함께 이야기하고 같은 시간에 눈을 뜨고 또 잠들던 소년. 둘에게 있어서 서로는 세상이었다. 그러나 서로가 온전히 서로를 사랑하게 될 즈음, 소년은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떠나간 소년의 자리에는 소년과 나눈 추억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소년의 모습을 지닌 인형은 태어났다. 소녀는 영원히 자신의 곁을 지켜줄 인형을, 「기사」라고 불렀다.
소녀의 기억속에서 소년은 참으로 용감하고 정의심 넘치는 존재였다. 같은 병실의 아이가 컥컥대며 괴로워할때, 공포에 물들어 떨기밖에 못하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소년은 기꺼이 고통에 떠는 아이의 손을 잡아주었다. 소녀의 눈에 그런 소년은 빛나는 사람이었다. 두근거리며 소년을 눈에 담는 소녀는 빛이 났다. 아무도 모르게, 그러나 고결하게. 수많은 아이들이 병실로 들어오고 나가도 소년은 소녀의 곁에 있었다. 하지만 소년은 알지 못했다. 소녀를 떠나가는 그 순간까지도. 소녀의 마음은 오롯이 소녀만의 것이었다.
인형, 기사로서 소녀의 곁에 남은 소년은 소녀의 고통을 함께 감내했다. 지독한 약도, 고통을 불러오는 순간도,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나을듯 느껴지는 순간들까지도, 인형은 소녀의 곁에서 소녀의 고통어린 눈물을 받아 마셨다. 소녀의 꿈안에서 소년은 언제나 싸우고 있었다. 그녀에게 고통을 선사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소녀와 얇지만, 약해보잊만 질기기 그지없는 운명이라는 끈으로 이어진채로. 인형은 소녀가 여인이 되는 기나긴 시간동안 함께했다. 때론 실밥이 터져 소녀가 고치기도 하고 소녀의 눈물이 상흔으로 남아 소녀의 미소를 담으면서.
"기회가 있었을까?"
아주 먼 시간이 흘러 소녀는, 노인이 된 소녀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에게 내가 고마웠다고, 기뻤다고, 좋아했다고……그렇게."
소년과도 같이 마지막 숨을 뱉어내던 그 순간에 소녀는 그렇게 마지막 눈물을 흘렸다. 아주 긴 시간이 지나, 아팠던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게 되었을때 소녀는 속삭였다.
"「기사」는 정말 든든했어. 내가 괴롭고 슬프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도 늘 곁에 있어주었거든."
소녀가 그 이야기를 할때면 늘 침묵이 따라왔다.
"그래서 고마웠어. 그래서 미안했어. 그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 그러기도 전에……."
소녀의 눈물은 빛이 났다.
"그는 떠나갔지. 「기사」도. 온통 헤져서 더는 어찌못할정도로 낡아서는 나를 떠나갔어. 나 대신 모든 아픔을 담은 채로, 나 대신 모든 슬픔을 담은 채로."
소녀의 미소는 아렸다.
"내가 기회를 가질 수 있었을까?"
소녀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에게 고백하는 순간을 내가 가질 수 있었을까?"
소녀가 지나온 순간이 아스라히 부서진다.
"그가 내 곁에 있어서, 그가 나의 힘이 되어주어서. 그에게 내곁에 머물러주어서 고마웠다고."
소녀의 중얼거림은 늘 똑같이 끝났다.
"결코 그럴 일은 없겠지……."
소녀는 아주 긴 고통의 터널을 지나 빛을 손에 넣었다. 소년도, 「기사」도 그녀를 떠난 후였다. 소녀는 고독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것은, 그것은 소녀의 머리속에 남은 소년이 가져온 기적이었을까? 소녀는 건강을 손에 넣었다. 남들과 비교하면 턱없이 나약한 육신이었지만 소녀는 병원을 벗어났다. 소녀가 맞이한 세상은 더없이 빛났다. 친애하는, 사랑하는 이가 미소짓는 세상은 아니였지만 소녀를 사랑하는 이들이 미소짓는 세상이었다. 소녀의 가족은 건강이라는 기적을 가지고 돌아온 소녀를 사랑했고, 그 귀환에 기뻐하였고, 그것은 세상을 좀더 행복하게 만드는 노래가 되었다. 소녀는 종종 말하곤 한다.
"그가 나의 「기사」였기에 내가 여기에 있어요."
소녀는 소녀와 같이 죽음과 삶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는 이들의 손을 잡았다.
"이제 나는 그 「기사」를 나의 마음 속에 품고있어요. 이젠 내 곁에 없지만……."
소녀는 여인이 되고 노인이 되는 그 기나긴 시간을 과거의 소년을 기억하는데, 그리고 그가 보여주었던 용기를 나누어주는데 사용했다.
"그는, 나의 「기사」는 더이상 형체로, 분명한 형체로 존재하지 않지만."
소녀는, 여인은, 노인의 미소는 행복으로 빛나고 있었다.
"내가 그로부터 세상을 향해 나아갈 힘을 얻었기에."
그는, 인형은, 「기사」는 그녀를 가두고 있던 고통이라는 것을, 두려움이라는 것을 부수는 검이었다.
"나또한 누군가의 「기사」가 되기를, 나로부터 힘을, 용기를 얻기를."
소녀는, 노인이 된 소녀는 아직 병약하던 먼 과거로 돌아가 미소지었다.
"기도할 뿐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