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Ce Trois Lune_아직 환상이 남아있던 시절] Larme de hiver
당신은 알고 있습니까?
당신이 살아가는 이 드넓은 세계가 셋이라는 것과 하늘 위에서 고고히 빛을 뿌리는 저 아름다운 달에게 형제가 있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습니까?
아주 짧은 시간, 아주 찰나의 순간에 쪼개어진 달이 하나 되는 순간, 그때를 가리켜 세 개의 세계의 주민들은 이렇게 부른다. Festival of The White Moon(하얀 달의 축제).
세 개의 세계를 보호하는 거대한 결계를 수호하는 세 개의 달의 이름은 약동하는 생명의 노란 달, The Life Moon(생명의 달).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붉은 달, The Death Moon(죽음의 달). 끝없는 상상의 푸른 달, The Imagine Moon(환상의 달).
그리고 그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들. 세계를 노리고 기어오르는 어둠들, 경계의 악몽, The Darks(어둠).
태초의 하얀 달은 그들로부터 세계를 보호하기 위하여 자신을 셋으로 나누었다. 그로 하여 세계에 흩뿌려진 달의 조각들, 달의 눈물, Jewel of Moon(달의 보석).
강제로 헤어지게 된 조화를 이루던 주민들은, 이별에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달의 보석을 그러모아 셋으로 나누었다.
결코, 너를 잊지 않기를-
결코, 우리의 시간을 잊지 않기를-
결코, 이 고통의 순간을 잊지 않기로!
수천 년 후, 달이 다시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인간들은 과거를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현재. 하지만, 죽은 자들은 과거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들에게 그것은 오직 추억. 하지만, 환상들은 과거를 곱씹을 뿐이었다. 그들에게 그것은 깊이 아로 새겨진 죄악. 달의 가호아래 생명들은 어리석었다.
그리고 흐려진 결계, 그 사이를 비집고 어둠들이 탐욕을 드러냈다.
대지가 죽음으로 가득 차오르고, 피가 강이 되어 흐르고, 절규가 대지를 가득 메웠을 때, 과거를 잊은 인간들이 뒤늦게 어리석음을 탓하고, 과거를 미화하기 바쁘던 죽은 자들이 비로소 진실을 바라보고, 죄악에 짓눌려 신음하던 환상들이 드디어 죄악의 굴레에서 고개를 들었을 그 때.
비로소 죽었다고 믿었던 인간들의 왕이, 세월 속에 스러졌다고 믿었던 죽은 자들의 왕이, 타락한 믿은 속에 사라졌다고 환상들의 왕이 나타났다.
환상들의 왕이 푸른 달이 선물한 이능을 발현했다. 굳건한 푸른빛의 결계, 그것은 희망의 빛이었다. 결코 끝없는 상상과도 같이 결계는 어둠들이 행하는 어떤 위협에도 부서지지 않았다.
죽은 자들의 왕이 붉은 달이 선물한 이능을 발현했다. 결계 너머를 꿰뚫어보는 붉은 눈, 그것은 사냥꾼의 눈이었다. 허상에서 벗어나 진실을 직시하는 그들의 정신과도 같이 그 눈은 숨어 기회를 노리는 어둠들을 찢어발겼다.
인간들의 왕이 노란 달이 선물한 이능을 발현했다. 결계 그 지고한 신성의 증거를 복구하는 손, 그것은 고귀한 힘이었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 인간들의 열망과도 같이 끝없이 찢어지는 결계들을 촘촘히 꿰매었다.
죽는 이가 사라지고, 어둠이 죽어가고, 찢어발겨진 결계가 온전해졌다. 그제야 대지에 죽음의 그림자가 물러가고, 대지에 흐르던 피가 멈추고, 절규가 잦아들었다.
그리고 인간의 음유시인이 노래했다. 인간과 죽은 자들과 환상들의 기억 저 깊은 곳의 추억을 끄집어 올렸다.
인간의 끝없는 열정과 끈기가 빛났다. 그들은 가장 나약했으되, 포기를 몰랐다. 죽은 자들의 검은 베일과 신념이 빛났다. 그들은 죽었으되, 두려움을 몰랐다. 환상들의 강인한 육신과 정신이 빛났다. 그들은고고했으되, 주저함을 몰랐다.
The Song of Moon(달의 노래). 달의, 달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그들의 진심어린 기원을 담은 노래에 달의 눈물, 달의 보석들이 빛났다. 아무런 색도 없이 하얗기만 하던 보석에 달의 빛들이 깃들었다. 세 가지 색으로 물든 보석들은 그들에게 힘을 선사했다. 그것은 어둠의 왕을 옭아매는 강력한 사슬이 되었다.
세 개의 달이 다시 나누어지던 날, 그들은 다시 한 번 약속했다.
너를, 나를., 우리를. 이번에야 말로 반드시 기억하겠노라고.
그리고 시간은 흐르고 흘러 다시 달들이 하나 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도 눈치를 못 챈 그 순간에, 아주 조용히.
℘
달이 하늘의 정 중앙에 자리한 시간. 적막함만이 홀로 남은 거리에 몇 명의 사람과 기괴한 생명체가 뒤얽혀 있었다. 뒤로 물러서 숨을 고르던 인영이 허리를 곧게 세우면서 외쳤다.
“피해!”
소리가 울려 퍼지자 보라색의 가루를 흩뿌리는 생명체의 몸뚱이에 흐린 노란 빛이 맺힌 검을 박아 넣었던 여인이 즉시 검을 회수하고 몸을 빼내었다. 여인의 움직임과 거의 동시에 멀리 떨어져 서있던 남자의 총구로부터 시작된 노란 빛의 탄환이 몸에 틀어박혔다. 달의 빛으로 이루어진 탄환을 맞은 생명체가 기괴한 비명을 토해내는 것에 명중을 확신한 여인은 즉시 검을 휘둘렀다. 검에는 아까와는 달리 선명한 노란 빛이 서려있었다. 생명체의 허리가 쪼개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525,600 minutes, 525,000 moments so dear. 525,600 minutes. How do you measure, measure a year?”
선명한 음성으로 노래를 부르는 이의 곁으로 노란 빛이 형성되었다. 노래하는 이의 곁에 서서 주변을 살피던 남자가 허리춤에서 독특한 형태의 만년필을 꺼냈다. 만년필에 박힌 노란색 돌조각이 둔탁하게 빛났다.
“In daylights, in sunsets. In midnights, in cups of coffee. In inches, in miles, in laughter, in strife. In 525,600 minutes. How do you measure a year in the life?”
여인의 노래가 절정을 향해 달려 갈수록 여인을 곁에만 머물러 있던
빛이 그 영역을 넓혔다. 빛의 영역에 들어온 보랏빛가루가 타올랐다. 검을 허공에 한번 휘두르고 검집에 넣은 여인이 빛이 선명한 공간으로 들어서자 몸에 나있던 자잘한 상처들이 빠른 속도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런 자신을 몸을 확인한 그녀가 만년필을 든 남자의 곁으로 다가갔다.
“찾았어?”
“아, 네. 저쪽이요. 등급에 비해 굉장히 거칠게 결계를 찢었네요.”
남자가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쓰면서 중얼거렸다.
“힘은 확실히 A등급이었는데?”
여인이 말하자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허공에 만년필을 휘둘렀다. 만년필이 지나간 허공에 노란 빛이 남아 기묘한 그림을 완성시켰다.
“아직은 B등급정도 였나봐요. 굉장히 거칠고 둔하게 찢어놨어요.”
한 남자가 손으로는 꼼꼼히 총의 상태를 확인하던 남자가 소년의 말에 빠르게 다가오며 믿기지 않는다는 어투로 말했다.
“거짓말! 그게 B라고? 소더, 그것도 제로급인 진아가 없었으면 우린 끝이었어. 관통상정도로 해결될 놈이 아니었다고! 이것보라고, 총도 금이 가버린 내 폭화를 두 번이나 견뎠는데 그게 B라고?? 그게 말이 되긴 하는 거냐고?!”
“카일 오빠가 약해졌나보죠. 진아 언니처럼 수련하세요. 매일 빈둥거리니까 그렇죠.”
노래를 불렀던 맑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성별을 구분하기 힘들게 깊게 눌러 쓰고 있던 후드를 벗은채라 찬란한 금발이 달빛아래 반짝였다. 다가온 소녀를 확인한 남자가 거칠게 머리를 털었다.
“정화는 다 했냐, 꼬맹아?”
“어라라~ 이 성가대소속 아일라를 뭐로 보는 거예요! 그 정도야 노래를 반도 부르기 전에 처리했죠!”
“아일라. 반도 안 불렀다고?”
“에? 네, 진아 언니. 반 조금 덜 불렀는데요, 왜 그래요?”
“확실히 문제가 있긴 하네. 하운, 결계 복구는 어때?”
대화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끝없이 허공에 그림을 그려대던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찢어진 단면이 거칠어서 그렇죠, 별로 어렵진 않아요. 아무리 봐도 B급이에요. A급같이 부드럽고 기교 있게 찢지는 못했어요. 거기다 아일라 양이 반도 안 불렀으면 빼도 박도 못하네요. B급이에요. A급의 힘을 가진 B급이라니. 뭔가 일이 터지려나 보네요.”
“이를테면 폭풍전의 고요, 라는 건가?”
카인의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복구 끝!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모든 것은 상부가 결정할 일이죠. 아직 ‘왕’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으니까, 아직은 괜찮나보죠.”
“끝났으면 보고하고 복귀하자.”
진아가 어둠속에서도 제 색을 잃지 않는 분홍빛 머리를 쓸며 작은 단말기의 동작버튼을 눌렀다.
-치직. 팀 아르마(arma). 통신 확인.
“팀 아르마 리더 0급 소더1) 장진아.”
-팀 아르마 리더 0급 소더 장진아 확인. 치직.
“팀 아르마 소속 1급 거너2) 카일 에브너, 1급 싱어3) 아일라 에이프럴, 1급 드로어4) 윤 하운 임무 종료 확인.”
-팀 아르마 임무 완료 확인.
“A급 파괴력 보유, 변이 B급 어둠 출현 및 결계 파손 복구 완료.”
-지칙. ……변이 B급? 치직.
“행동패턴, 결계파손정도 확인 결과 B급. 전투력은 A급 확인. 1급 거너 파괴력을 2회 견딤.”
-지칙. 어둠 이상 상태 보고 확인. 치직. 팀 아르마 복귀를 명령합니다. 지칙.
“복귀 명령 확인”
진아가 단말기의 전원을 끄자 카일이 푸른 머리를 거칠게 긁었다.
“뭐야, 본부 쪽도 모르는 거였어?”
“이쪽이 처음 발견한 거겠죠. 그럼 복귀하는 거예요, 진아 누나?”
진아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하늘의 달을 바라봤다.
“아?”
빠른 속도로 주변을 정리하고 복귀를 준비하던 이들이 진아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뭐야? 다친 거야?”
“아뇨, 뭔가가 눈에 들어간 것 같아서.”
눈을 깜박이다가 비비기까지 하는 행동에 아일라가 다가섰다.
“비비지 말구 어디 봐요.”
가만히 눈을 들여다보던 아일라가 고개를 갸웃 거렸다.
“딱히 뭔가는 없는 것 같은데. 계속 아프면 병원이라도 가요.”
“아아…….”
빠르게 전투가 벌어진 곳을 떠나는 이들의 머리위로 반짝거리는 빛들이 바람을 타고 흘러갔다. 아주 천천히 그러나 조금은 소란스럽게.
℘
통칭 이름 없는 기관5)은 일종의 비밀결사단체였다. 세간에 비밀결사단체로 이름 떨치는 프리메이슨과 유사한 비밀 단체지만 다른 점이라면 그들은 끝없이 이어지는 전쟁 속에 존재하며, 민간인에게는 관심조차 없는 이들이라는 점이였다. 그들은 대부분의 인원을 고아나 그들의 적으로부터 희생당한 자들의 혈족, 그리고 구성원의 혈족이나 트리뷰널6)의 추천을 받은 이들로 구성이 되었다. 또한 이 이름 없는 기관은 범국가적으로 그 존재를 인정받는 단체였다.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는 비밀을 간직하고 그것을 지키는 존재들, 일국의 지도자정도는 되어야 그들의 존재를 알 수 있으며 조금이나마 그들의 정보에 접근이 가능했다. 이름 없는 기관은 그렇게 세상과 그들의 힘에 대한 비밀을 유지했다. 그런 이유로 이름 없는 기관의 본부는 웬만해선 소란스러워 질 일이 없었다. 구성원들은 적을 막기 위해 늘 세계를 떠돌았으며 그들의 존재조차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적은 치밀했고 포악했으며 전염병과도 같은 존재였기에 그들에게 있어 본부란 임무 후의 휴식처이자 언젠가 돌아갈 집이요, 등을 맡길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 고요해야 마땅할 본부가 소란에 휩싸였다.
이름 없는 기관의 가장 깊은 곳들 중 하나이자 기관의 두뇌를 담당하는 홀은 소란스럽기 그지없었다. 평소의 고요함과 엄숙함은 날려 버린 채로 고성이 오갔다.
“지금 랩7)을 무시하는 건가요?!”
“그대야말로 우리 세네트8)의 결정을 무시하는 건가?”
“아르마예요-!! 능력으로 그들을 넘어설 수 있는 이들은 마스터 팀9)뿐이라고요! 그런 그들이 고전했다고 보고해 왔어요!! 큰 문제라고요!!”
“그렇다고 그들이 마스터 인 것은 아니지 않나, 랩 리더? 그들의 실력은 아랫것들 중에서도 강한 것일 뿐이며. 그들의 등급은 힘에 대한 인정일 뿐, 그 외의 부분에서 그만한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네.”
랩의 리더, 윤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노인네들이 꽉 막혀서는 현실의 위험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들의 적, 어둠은 자연의 법칙 그 외의 존재였다. 그들은 기괴했고, 인간과 생명체들을 숙주 삼아 번식했다. 인간이나 다른 생명체들의 특징적인 약점들 중 하나인 혈액은 지니고 있지 않으며 보라색 가루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가루를 들이마시면 숙주가 되어 또 다른 적이 되는 것이다. 서아는 신경질적으로 무테안경을 추켜올렸다.
“좋아요. 고귀하신 세네트분들, 이번에는 랩이 물러서죠. 하지만 알아두시라고요, 우리는 경고했어요. 결계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어둠이 진화하고 있다고!!!”
“오, 랩의 리더여.”
7인의 세네트들의 지도자격인 노인, 카온이 입을 열었다. 인자한 할아버지를 연상시키는 목소리와는 달리 그의 눈은 권위에 대한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우리 세네트는 70년 이상 그들을 보아왔소. 그대들 랩의 유능함은 인정하나, 우리의 지혜는 아직 녹슬지 않았다오. 우리는 이것이 그다지 위험한 것이 아니라 판단하오. 무엇보다, 왕10)께서 미동하지 않으셨소.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위험하지 않은게요. 알겠소, 랩의 리더여?"
카온의 어이없는 말에 서아가 몸을 돌렸다.
“알겠어요. 어리숙한 랩의 리더는 물러가죠, 세네트분들!”
소네트의 홀 밖으로 나가 어둠속에 묻혀 사라지는 서아와 그녀의 화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발걸음을 지켜보던 여인이 입을 열었다. 나이가 무색하게도 힘 있고 우아한 목소리가 세네트의 홀에 퍼져나갔다.
“리더, 카온. 저는 당신의 말에 일단 동의했습니다. 그렇지만은, 랩의
리더의 말이 굉장히 걱정되는군요. 어둠은 우리의 적입니다. 그들에게 신의 규율은 적용되지 않아요. 무엇보다 왕께서 반드시 위험의 직전에 일어나신다는 기록도, 확신도 존재하지 않아요. 저는 우리의 평화를 지속하고자 하는 마음이 진실을 외면토록 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스럽군요.”
그녀의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그들도 인정하는 바였다. 그들은 늙었고, 안정을 추구했다. 그것은 수많은 지혜와 선견지명을 주었지만 동시에 위험을 외면하도록 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어둠은 정의하기 힘든 것이었고, 그들이 지닌 지혜가 완벽한 것이라 말하기도 곤란했다.
“시스터, 나이아. 지금 고귀한 신의 마지막 신성이 변질되고 있다는
저 어린 아이의 말을 믿는 겝니까? 고고한 수녀인 당신도 그런 헛소리를 믿는 겝니까?!”
카온의 호통에 나이아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런 말이 아닙니다. 랩의 리더는 ‘이상’이 있다고 하였지 그 신성의 ‘변질’을 주장하지 않았ㅇ…!”
“시스터, 나이아!!! 닥치시오! 그 말이 그 말 아니오?!어찌 신의 신성에 이상이 있을 수가 있다는 말이오!”
가만히 앉아있던 다른 세네트들 중 하나가 발끈했다. 그에 나이아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 두고 볼 일이지요. 저 또한 그녀의 말이 그저 기우이길 바랍니다. 나이트, 제펠. 저라고 신의 마지막 신성을 의심하는 말을 하고 싶겠습니까? 신을 지키기 위하여 검을 갈고닦은 당신과 달리 나는 신을 모시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친 자입니다.”
나이아의 조용하지만 날카로운 말을 끝으로 세네트들이 머무는 세네트의 홀이 다시 고요 속으로 가라앉았다. 소란스러웠던 적은 한 번도 없는 것처럼.
끝없이 쌓이는 업무를 처리하던 랩의 연구자들이 쿵쾅거리며 들어오는 서아를 보고 이리저리 움직이던 몸을 멈추고 킬킬거렸다,
“왜 그래요, 그러다가 힐 나갑니다아!”
짓궂은 부서원들의 말에도 씩씩거리길 멈추지 않던 서아가 서류를 책상위로 집어던졌다.
“지네가 세네트면다냐!! 한, 두 팀이 보고했으면 내가 넘어가지! 지넬 괴롭히겠냐고!! 내가 그렇게 할 일이 없는 줄 알아?! 나도 바쁜 몸이라 이거야!”
한 마리의 짐승과도 같이 포효하는 리더의 모습에 누군가 입을 열었다.
“왜요? 결계엔 이상 없을 거래요?”
“어!!완전 돌은 것 아니야?! 노망난 게 틀림없다고! 지네가 봐오면 봐온 거지, 나이가 뭔 대수야!! 안 그러냐?! 내가 지금 최연소 랩 리더라고 깔보는 거지, 앙?!”
단정하게 묶은 머리마저 엉망으로 망가뜨리면서 난동을 부리는 그녀의 모습에 모두 난처하다는 듯 웃었다. 세네트는 늘 그런 식이였다. 전통과 신성에 얽매인 그들은 랩의 기술과 조사를 믿지 않는 일이 허다했다. 더욱이 ‘왕’도 잠들어 있는 이 시기에는 더했다. 그들에게 있어 ‘왕’이란 전능한 존재였고 구세주였으며 진리였다. 왕에 대한 기록은 단 몇 줄이었다. 신의 마지막 신성, 하얀 달이 결계와 함께 낳은또 다른 흔적이자 기적을 몰고 오는 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어난 달이 하나 되던 시기, 피와 절규가 온 세상이 뒤덮던 때, 오랜 잠에서깨어나 다른 세계의 왕들과 함께 세상을 구원하였다. 랩의 연구원들은 ‘왕’의 존재를 믿었지만 세네트와 같이 그 존재를 맹목적으로 신봉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문헌과 그들이 보는 현실을 믿었고, 그들이 수집하는 데이터를 믿었다. 기록은 ‘왕이 깨어나 세상을 구원했다’고 전하지 ‘왕이 위기의 순간 깨어났다’고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세네트의 주장이 달갑지 않았다.
“자자, 그만 난리 치시고 이것 좀 봐주세요. 아까 아르마의 보고가 들어올 때 측정된 건데요. 갑자기 이쪽에서 급격하게 결계의 유동이 심해지더니 작지만 수천 개의 에너지 반응이 나타났어요.”
거칠게 씩씩거리는 서아를 의자로 인도한 남자가 서류철을 내밀었다. 서아의 눈이 지도를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이 시점을 기준으로 30분 전, 그러니까 리더가 세네트에 있었을 때, 다시 한 번 반응이 강하게 나타났어요. 그리고서는 소멸. 갑자기 사라졌어요. 감염반응이 없어서 어둠은 아닌 것 같은데요. 정확하게 파악을 할 수가 없어요.”
남자의 보고에 서아가 서류를 받아들곤 빠르게 넘기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결계가 유동했다고?”
“네, 찢겨질 때 나타나는 파동과는 달라서 그렇게 표현했어요. 이거 방금 뽑은 상태그래프인데요. 여기 보면 어둠이 나타난 이후에는 복구하기 전까지 굉장히 불안정하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굉장히 안정적이거든요.”
“어둠이 출현한 것은 아니라는 거네. 그럼 이 자잘한 에너지 반응과 관련된 건가?”
“저도 그렇게 추측 중인데요, 정확히 모르겠어요. 자료를 뒤져도 이런 반응을 찾을 수가 없어서요.”
둘이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자 모두 자신의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잔혹한 살인마가 나타나 모두를 죽이더라도 랩은 멈춰서는 안 되었다. 그 희생양이 그들의 혈육이라 할지라도.
℘
“복귀했어요.”
고요하지만 부산스러웠던 랩이 일순 조용해 졌다. 전원 1급 이상으로 구성된 엘리트 팀, 아르마가 본부로 귀환했다. 4명이 들어서자 원단더미를 들고 있던 여자가 진아를 붙잡았다.
“진아 씨!! 코트 어땠어? 이번엔 좀 튼튼하게 만들어 봤는데.”
아. 유렐 씨. 쓸모없었어요. 너무 길어서 거추장스럽더군요. 안에 조끼랑 와이셔츠는 그나마 쓸 만 했지만 말이죠.”
“오, 정말? 미안해서 어쩌나. 그럼 코트 기장만 조금 조절하면 될까?”
“하. 멀리서 총질이나 해대는 장거리 거너들에게나 던져주시죠.”
진아 답지 않은 거친 언사에 당황하면서도 꼼꼼히 필기하던 손이 멈췄다. 그리곤 입술을 지그시 깨문 그녀가 알겠다고 말하며 랩의 구석으로 돌아갔다.
“와, 언니 이거 다음 제복이였어요?”
“아, 응. 일단 추워지니까. 보온성을 높이고 방어력도 높인다고 하더라. 쓸모없어.”
진아가 질문에 답하자 하운이 입을 열었다.
“솔직히 드로어들의 경우에는 이 후드가 딱이예요. 적당히 눈을 가리기도 좋고.”
“뭐, 아무래나 상관없잖아. 듣자하니 겨울용 제복인거잖아.”
그건 그렇다며 카일의 말에 동의를 표하던 이들이 개인 사무실에서 나오는 서아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넷 다 수고했어. 그럼 다음 임무야.”
“어이, 우린 이제야 귀환했다고?”
카일의 말을 무시한 서아가 말을 이었다.
“일단 아일라는 칸티큐11)쪽에서의 호출이에요. 벨페스타12)쪽에서 일정이 내려왔나 보더군요. 그리고 하운은 병동으로 가세요. 아버님께서 의식을 되찾았다고 연락 왔어요.”
“지……진짜요?!”
하운이 벌떡 일어나 소리 지르듯 질문하자 살짝 인상을 쓴 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벨페스타쪽에서 전달해온 사항이니 분명해요. 카일은 알비테13)로 가세요. 총이 또 망가졌다죠? 알비테쪽에서 카일에게 맞는 총을 만들었다고 하네요. 진아는 바로 새 임무예요. 그전에 나랑 잠시 면담 좀 해요. 이상. 아르마는 해산하세요!”
서아가 손뼉 치며 지시하자 모두 갈 길을 가기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이, 하운, 축하한다. 어둠한테 감염되었는데도 회복하신 거잖냐. 축하한다!”
카일이 거칠게 하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알비테의 공방 쪽으로 사라졌다.
“하운오빠, 축하해요!!! 정말 다행이에요!!!”
하운의 손을 잡고 휙휙 휘두른 아일라까지 사라지자 하운이 진아를 바라보았다.
“꼴사납네.”
차갑게 돌아서는 진아를 본 하운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하운은 몸을 돌려 랩의 한쪽에 위치한 이상관리부서로 다가갔다.
“진아야, 혹시 보고할 때 누락된 정보라던가 있니?”
조심스럽게 묻는 서아의 말에 진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보고도 제대로 듣지 않을 거라면 왜 그 자리에 있어요. 얼른 임무나 줘요.”
거친 언사에 서아가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바로 임무라 정말 미안한데 어쩔 수가 없었어요. 진아가 제일 뛰어나니까. 임무는 이래요, 단순한 조사구요. 팀 아르마가 보고한 직후 결계가 유동하면서 수천 개의 에너지 반응이 쏟아져 내렸어요. 그리고 30분 후. 강력한 에너지 반응이 나타났다가 소실되었죠. 우리는 어둠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는데 얼마 전 북극 쪽에서 강력한 에너지 반응이 감지되었어요. 지금 임무가 없는 0급은 진아, 너뿐이라 바로 임무를 줄 수밖에 없어. 힘들겠지만 조사 부탁할게. 미안해.”
“미안한 줄 알면 하질 마시죠.”
임무의 정보가 적힌 종이를 잡아챈 진아가 서아의 사무실을 나가버리자 서아가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이상하게 행동이 거치네. 왜 저러는 ㄱ…….”
진아가 나가자마자 울리는 노크소리에 자세를 다잡았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나타난 것은 하운과 랩 특유의 하얀 가운을 입은 한 여자였다.
“어라? 하운…이랑 이상관리부 부장?”
“조금 심각한 문제라서요, 실례하겠습니다.”
하운의 정중한 말에 서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앞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흠흠. 하운 씨의 말에 따르면 보고를 마친 후 하늘을 보던 진아 씨가 눈의 통증을 호소했다고 해요. 즉시 눈을 확인했지만 이상은 없었고요. 그리고 그 직후부터 진아 씨의 언사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고 하더군요. 아까도 보셨겠지만 굉장히 부정적이고…….”
“아아, 그건 느꼈어요. 계속 신경질적이던 어투고…….”
“네, 그래서 랩의 입구에 설치된 에너지 관측기의 기록을 조금 살폈는데 진아씨의 눈과 심장 쪽의 반응이 미묘하더라고요. 파장을 비교해보니 그때 나타난 반응들과 유사해서요.”
“그게 바이러스라고 말하는 건가?”
“아뇨, 그렇지는 않아요. 바이러스라면 저희 모두 감염되었어야 하니까요.”
하운이 대화에 끼어들자 모두 하운의 말에 집중했다.
“해당 증상은 진아 씨에 한정해서 발견되었어요. 지속적으로 접촉했을 아일라 양과 하운 군, 그리고 카일 씨는 멀쩡해요. 저는 그게 눈의 고통을 호소한 것과 관련 있다고 봐요. 아일라 양도 진아 씨가 심장에 고통을 호소하기도 했다고 했으니까요.”
“리더. 이건 저의 개인적인 추측이지만요, 그 작았던 에너지 반응들은 어둠의 보랏빛 가루처럼 어떤 힘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아요.”
주저하며 보고하는 그녀의 말에 서아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 에너지 반응들을 다 수거하는 것은?”
“절대 무리예요. 반응중 대다수는 이미 사라지고 없어요. 전 세계적으로 퍼졌고요.”
“그럼 보고된 사례들, 혹은 앞으로 보고될 사례들에서 진아랑 비슷한 증상이 있는지 조사해 줘요. 하운이도 수고했고, 얼른 가 봐요. 기다렸잖아.”
그제야 기억해낸 듯 서둘러 인사하고 나가버리는 그를 본 두 사람이 시선을 맞추었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알아봐요. 결계가 흔들리는 주기가 짧아지기 시작했다는 보고가 있어. 이대로는 얼마 못 버텨요. 다 추측이긴 하지만.”
“네, 저도 그냥 추측이기를 바라고 있어요. 이 평화는 아슬아슬하긴 해도 오랫동안 유지되어 왔어요. 하운씨도 그쪽이죠? 피해자.”
“네. 하운의 어머니 쪽이 숙주가 되어서 하운과 아버지를 공격했고, 그때 하운의 힘이 발현되었죠. 주변에 파견되어있던 팀이 정리하고 구출했지만……. 하운의 아버지는 상태가 심각해요. 파빌론14)의 기술로 겨우 살아났지만…….”
입술을 깨무는 서아를 바라보던 부장이 정중히 인사하고 나가자 서아가 팔로 눈을 가렸다.
“아, 진짜 못해먹겠다.”
그녀의 중얼거림이 허공에서 부서졌다.
℘
“아, 진짜 주변은 하얀색이고. 무슨 정신병원도 아니고.”
투덜거리며 주변을 돌아보던 진아는 거칠게 주저앉았다. 에너지 반응을 인간이 잡아낼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달의 보석과 공명하는 헌터들과 프레이어들은 달의 힘을 이용해 조금이지만 인간과는 다른 힘을발할 수 있었다. 어둠을 처리하는데 쓰이는 힘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반적인 인간의 무기로는 그들에게 상처는커녕 생채기도 낼 수 없었지만 그것에 달의 보석을 통해 이끌어내는 신성을 이용하면 과도나 자같은 사소한 물건들로도 그들을 상처 입힐 수 있었다.
“이딴 돌조각에 의지한다는 게 자존심 상하지만.”
검 손잡이의 끝에 달린 노란색의 보석을 툭툭 치며 하늘을 보자 새하얀 썰매가 허공을 스치고 지나갔다. 썰매 그려내는 흰색의 궤적을 바라보던 진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 발견인가. 후우.”
- 시간을 거슬러 올라 며칠 전, 푸른 달의 세계.
“푸른 달 아래 유일한 왕이시여.”
새파란 인어가 유려하게 몸을 굽혀 인사했다. 그 인어를 향해 고개를
고정하고 있던 회색빛의 머리를 지닌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떴다. 신성하다 못해 시린 푸른 눈이 자신을 향함에 더욱 깊이 고개를 숙인 인어가 입을 열었다.
“눈의 여왕이 사라졌나이다. 악마들이 말하길, 트롤들이 어둠에 노출되어 변질된 달의 보석을 제련하여 만든 조각들이 결계의 밖으로 흘러나가던 날, 근처를 지나던 눈의 여왕도 함께 사라졌다 합니다.”
조용히 보고하는 그녀를 바라보던 푸른 달의 세계의 왕이 입을 열었다.
“그냥 지켜보도록 해요. 그녀가 어찌 결계를 통과하였고, 결계가 왜 흔들렸는지 우리는 알 수 없어요. 마지막 신성인 달이 그 위대한 신성을 바쳐 만든 저 결계가 어떤 연유로 그리 되었는지 알기에는 우리는 모두 무지몽매한 피조물에 불과한 것을요.”
다시 눈을 감는 왕을 지켜보던 인어가 깊숙이 몸을 숙이고는 물러났다.
광활한 얼음의 대지를 가로지르던 눈의 여왕은 거칠게 발을 굴렀다. 썰매를 끌던 눈으로 된 순록들이 주춤거리다가 사나운 그녀의 외침에 다시 발을 움직였다.
“오오, 어찌나 재미가 없는지. 노란 달의 영역이라 해도 재미있는 것이 없잖아! 차가운 심장! 그리고 푸른 눈! 이다지도 심심한 곳에 가려고 하는 얼간이들의 생각은 알 수 없다니까.”
평소와 같이 산책을 나선 눈의 여왕은 멍청한 악마들이 거울을 나르다가 깨트리는 것과 그 조각들이 이상한 구멍을 통해 사라지는 것을목격했다. 그녀는 따분하기 그지없는 일상에 생겨난 하나의 변화를 두 팔 벌려 맞이했다. 기꺼이 구멍 속으로 뛰어든 그녀가 당도한 곳은 노란 달의 세계이며, 하얀 달의 축제가 벌어지는 시기가 아닌 이상 결코 방문할 수 없는 곳이었다. 오래전의 약조로 맺어진, 그리고 신들의 마지막 흔적이 정한 사항이기 때문에 그녀는 기꺼이 인간들이 없는 하얀 눈의 땅, 북극에만 머물고 있었다.
“어라? 저건 뭐지?”
눈의 여왕은 대지의 아래에서 기묘한 인간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심장을 가진 여자. 눈의 여왕은 즉시 썰매를 대지에 내릴 것을 명했다. 순록들이 썰매를 대지에 조심히 내려놓자 그녀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창백한 그녀의 얼굴과는 다른 생기로 가득 찬 여자의 모습에 그녀는 탐이 났다. 함께 있으면 즐거울 것 같은 느낌에 그녀는 지금껏 지켜오던 금기를 범했다.
“넌 왜 차가운 심장을 지니고 있지?”
“하. 당신인가? 알 수 없는 에너지 덩어리. 꼴을 보아하니 푸른 달의 세계에 사는 주민 같은데 왜 여기에 기어들어와 있는 거야.”
그녀의 거친 언사에 눈의 여왕이 웃었다. 부드러운 분홍빛 머리도, 차가운 푸른 눈도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심장과 눈에서 느껴지는 트롤들의 힘. 그리고 변질된 조석의 기운이 미치도록 유쾌했다.
“너의 이름은 뭐지?”
“들어서 뭐하게. 자, 어서 말해. 왜 여기에 있지? 푸른 달의 가호아래의 생명이여.”
검을 잡으며 전투를 준비하는 진아에게 순식간에 다가선 여인이 입술에 입 맞췄다.
“오, 차갑게 질려있구나. 내가 추위를 느끼지 않도록 해주마. 그리고 잊게 해줄게. 그런 거친 언사를 그 예쁜 입으로 하는 게 아니란다. 노란 달 아래의 아이야.”
눈의 여왕의 목에 걸린 푸른 달의 보석이 시리게 빛났다. 그녀는 빛을 잃어가는 진아의 눈을 보곤 밝게 웃었다.
‘이런 제길.’
움직이지 않는 손으로 바들거리며 단말기의 위급 신호를 보낸 진아는 정신을 놓았다. 축 늘어지는 진아를 안아든 눈의 여왕이 그녀를 썰매에 싣고는 순록들에게 명령했다. 그녀의 성을 향해 달려가는 썰매의 흔적만 길게 남았다.
“긴급신호 감지! 추적에 들어갑니다!!”
부산스럽지만 조용하던 랩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전자계통의 연구원들이 하던 일을 내던지고 추적을 시작했다. 혹시 모를 해킹을 방지해 전원 동일한 코드를 이용하는 지라 수색범위를 좁히기 위하여 발생위치를 찾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발생지점, 북극!!”
“임무일지 확인! 긴급신호 발신자 확인!! 장진아!!”
급박하게 랩이 돌아가는 와중에 진아가 발신자라는 것이 확인되자 모두가 멈춰버렸다. 0급. 4단계로 나누어지는 헌터와 프레이어들의 최상층. 무력으로는 견줄 자가 없는 존재가 바로 0급이였다. 더욱이 헌터라도 소더들의 전투력은 동급의 거너들 이상이었다. 모두가 허탈해진 가운데 누군가가 소리 질렀다.
“겨……결계 파손 발생!!”
0급 소더가 긴급신호를 발신한 것 이상으로 중대한 사항에 랩의 전원이 소리 지를 연구자를 향해 고개 돌렸다.
“무슨 소리야, 그게!!”
“파……파손범위……넓어지고 있습니다!!”
공포로 얼룩진 그의 얼굴에 랩 전원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모두가 어이를 잃은 그 순간에 한 사람이 랩의 연구실로 뛰어 들어왔다. 후드를 뒤집어쓴 사람은 소리 질렀다.
“하늘에!! 하늘에 달이 세 개예요!! 하얀 달의 시간이라고요!!”
절규에 가까운 외침에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서아였다.
“통신팀!! 당장 전원에게 연락 넣어요!! 기록에 따르면 균열은 어둠이 기어오른다는 증거예요! 침입이 시작될 거야!!”
그녀의 지시에 통신을 담당하는 이들이 즉시 연락을 돌리기 시작했다.
“전체 알림! 전체 알림! 하얀 달의 시기가 다가왔다-!! 전원 전송되는 포인트로 집결!!”
“반복한다!!”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사활을 건 전쟁. 그리고 세계를 걸고 벌어지는 거대한 도박. 이기는 자는 달의 기호가 가득한 대지를 지니고, 지는 자는 혼돈이 가득한 무의 공간으로 추방되는 전쟁. 갑작스럽게 직면하였으나, 모두들 필사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이기고 말겠다는 의지와 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지니고.
“오, 일어났니?”
빛을 잃은 눈이 흐릿했다. 흐린 푸른 눈을 본 눈의 여왕이 흐뭇하게 웃었다.
‘참으로 찬란한 보석이 아닌가!’
“여긴……?”
“겨울의 땅이란다. 노란 달 아래의 아이야. 아, 이름이 뭐니, 노란 달의 아이야? 호호호.”
웃는 눈의 여왕을 보는 진아의 눈이 흐렸다. 눈의 여왕은 사납게 빛나던 눈을 회상하며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곁에 묵어두려면 이 방법뿐이었다. 푸른 달의 보석을 통하여 심장을 얼리고, 기억을 얼린다. 이곳을 벗어나고 싶지 않도록. 영원히 그녀의 곁에 남도록. 눈의 여왕은 멍한 진아를 두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노란 달만 빛을 발하던 하늘에 두개의 달이 더 나타나 있었다. 죽음을 상징하는 붉은 달과, 환상을 상징하는 푸른 달. 하나로 합해지기 시작하는 부분부터 흰 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하얀 달의 시기가 다가왔구나…….이번에도 어둠은 이곳을 노리겠지. 모두가 전투가 가능한 두 세계와 달리 이곳은 극소수만이 싸울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뒤에 있을 진아가 지니고 있는 검을 떠올렸다. 달과도 같이 충만한 생명력을 지닌 그 보석. 노란 달은 다른 달들과 달리 수많은 전사보다는 소수의 전사를 택했다. 양보다 질. 그들의 전투력은 계속해서 올라갔다. 생성되는, 태어나는 그 순간 힘이 정해지는 환상들이나 죽은 자들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그녀는 진아가 달의 힘을 쓰는 자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보내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녀는 너무 오랫동안 혼자였고, 그녀는 외로웠다. 그녀가 그토록 부정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
헌터와 프레이어들로 구성된 팀들이 포인트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먼저 도착한 랩의 구성원 중 일부와 교육중인 벨페스타 산하의 학생들, 그리고 전투력을 대부분 상실한 벨페스타의 교사들이 필사적으로 방어선을 유지했다. 아슬아슬 하기 그지없는 그 전장에 하나 둘 사람들이 나타났다. 거너들의 총구가 탄환을 쏟아냈다. 달의 힘으로 구현된 탄환들은 사정없이 어둠들을 관통했다.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서아는 신음했다. 천천히 균열이 커져만 간다. 어둠들은 분명히 눈치 채고 있었으리라. 개개인의 강함은 아직까지 이름 없는 기관이 우세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들은 지쳐가기 시작할 것이었다. 인간에게, 생명체에게 있어서 체력이란 한정적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입술을 짓씹던 서아가 단말기를 들어올렸다.
생산력을 최대로 끌어올린 알비테는 끝없이 무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달의 힘은 인외의 힘이며 신성의 잔재였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무기가 아무리 단단한들 결국 마모되기 마련이었고 지금과 같이 전투가 지속되는 상황에서는 더욱 빠르게 마모되었다. 프레이어들과는 달리 헌터들의 무기는 굉장히 마모속도가 빨랐다. 육체를 매개로 하는 프레이어들과는 달랐다. 열기로 가득한 공간 안의 유일한 단말기가 작동했다.
-치직. 카일. 치직. 들리나요?
“응? 무슨 일이야?”
알비테의 장인이 다듬고 있는 총을 지켜보던 카일이 답했다.
-달. 치직. 소식은 들었. 치직. 죠?
-치직. 북극으로 가세요. 치직. 가서. 치직. 진아를 구해와요. 치직.
“왜? 진아를…….왜 진아를 구해야 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카일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떨기 시작하는 다리가 그의 심정을 정확히 보여주었다.
-치직. 조사를 위해. 치직. 갔는데 긴급. 치직. 신호가 왔어요. 치직.
“…….위치, 전송해줘.”
-네. 치직.
푹 고개를 숙인채로 답한 카일이 벌떡 일어나 장인에게 다가갔다.
“알버트 씨. 나 엄청 급해요. 진아가 위험하대. 얼마나 걸려요?”
울 듯 일그러진 그의 얼굴을 힐끔 쳐다본 장인, 알버트가 입을 열었다.
“후. 30분. 그만큼만 기다리게나. 내 서두르지.”
“고마워요.”
“자, 가서 몸이라도 풀고 있게. 완성되면 바로 이동할 수 있도록!”
전투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싱어들은 목이 터져라 노래 불렀다. 능력 컨트롤에 서툰 일부 싱어들은 기절해 끌려 나가기도 했다. 계속해서 커지는 균열에 서아는 기절한 이들을 위해 결계를 생성하던 드로어들 중 일부를 빼내었다.
“지금부터 결계를 복구하는 거예요. 계속 부서지고 부서진 틈으로 어둠이 기어오르니 조금이라도 메꾸는 겁니다.”
“하지만 랩 리더. 그건 무리예요.”
드로어들 중 하나가 손사래 치자 서아가 매섭게 눈을 치켜떴다.
“지금은 장난이 아녜요!! 헌터들의 체력이 어디까지 버틸 거 같아요?! 싱어들의 노래로 체력을 보충하고 있지만 그것도 곧 한계가 올 거예요! 안보여요?! 벨페스타에서 교육중인 3급 판정도 못 받은 햇병아리들도 싸우고 있잖아요!!”
무리라고 말한 드로어가 입을 다물자 다른 드로어가 깃펜을 손에 들고 앞으로 나섰다. 허공을 가르는 깃펜이 빛나는 궤적을 허공에 그려냈다. 기묘한 글들이 완성되고 그것은 실이 되어 부서진 결계를 메꿨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결계가 다시 부서졌다. 그 것을 확인한 드로어가 다시 앞으로 나서며 입을 달싹이자 궤적을 그렸던 드로어가 후드를 벗었다. 식은땀이 흐르는 얼굴을 후드자락으로 대강 닦으며 웃었다.
“일단 복구는 되네요. 이거 해볼 만한데?”
달의 빛을 받아 부서지는 붉은 머리가 매혹적이었다.
모두가 필사적으로 전투에 임하는 시각, 카일은 북극에 당도했다. 단말기를 확인하며 위치를 가늠하던 카일은 한숨을 쉬었다. 미쳐버릴만큼 초조했다. 진아를 구한다.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는 선택지였다. 진아는 벨페스타였을 때부터 월등하게 강했다. 일반적으로 강한 소더들 중의 한명이라는 것을 고려할지라도 진아는 굉장히 강했다. 엄청난 재능, 뛰어난 전투센스, 그리고 그 이상의 노력. 카일은 어느새 멈춰있던 다리를 다시 움직였다.
“가야해.”
제대로 된 기억도 남아있지 않으면서 진아는 끝없이 중얼거렸다. 눈의 여왕은 눈을 감았다 뜨면서 작은 얼음조각들을 진아에게 집어던졌다.
“그 조각으로 네가 잃은 것을 만들면 보내주겠어. 맞추기 전에는 어림도 없을 줄 알아!”
진아는 멍하니 얼음조각을 잡았다. 가야한다는 맹목적인 일념 하에 그녀는 천천히 퍼즐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의 여왕이 만들어 낸 얼음의 성의 입구에는 눈의 여왕에게는 훼방꾼이며, 구원자가 될 남자가 서있었다.
“하? 이게 뭐야.”
푸른빛에 휘감겨있는 얼음의 성을 바라보는 카일의 눈이 매서워졌다. 발신지에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카일은 전 방위 탐색을 시작했다. 꽤 오래 걸리고 까다로운 작업 끝에 도달한 곳은 자연의 규칙에 어긋난 구조물이었다. 섬세하게 세공된 얼음의 성 앞에서 카일은 총을 붙잡았다.
‘곤란하네.’
성안은 총을 붙잡은 손이 얼어붙을 만큼 차가운 냉기로 가득 차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홀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자 다그닥거리는 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려왔다.
‘누가 있군.’
적이 누군지 모르는 상황이니 조심스럽게 소리의 근원지로 다가선 카일은 반가운 얼굴을 찾을 수 있었다. 파리하게 질린 입술과 시퍼레져 동상에 걸리기 직전인 손. 카일은 적이고 뭐고 뛰어가 그녀의 손에서 얼음 조각들은 떼어냈다.
“여기서 뭐 하ㄴ……!”
“쥐새끼가 기어들어왔구나.”
분노가 깃든 음성이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얼음조각들이 카일에게 쇄도했다. 날카롭게 벼려져 보는 것만으로도 오싹한 얼음의 창이 계속해서 바닥에 박혔다. 추운 날씨에 몸이 굳은 카일이 아슬아슬하게 피해냈고 진아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정신없이 피하던 카일은 얼음조각이 날라오지 않음에 이상함을 느껴 고개를 들었다.
“뭐…뭐야, 이 소름끼치는 기운은?!”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여왕이 비명 질렀다. 공포로 얼룩진 여왕의 눈에 카일이 허리를 폈다.
“결계가 부서졌다더군.”
“뭐…뭐라고?! 거짓말!!! 달의 결계는 신성이야! 지금은 사라졌지만 두 신이 마지막으로 만든 신성이라고!!!”
세네트를 보는 듯 한 말에 카일이 머리를 긁적였다.
“나도 잘 몰라. 정확한건 결계는 부서졌고 지금도 부서지고 있어. 난 진아를 데려가야 해. 그녀는 우리 기관의 강자야. 다음 대의….”
어느새 카일의 손에는 총이 들려있었다. 단순한 권총과도 같은 모양이었지만 섬세하게 들어간 문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장식품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시린 권총의 끝에 노란 빛이 스며들었다.
“푸른 달 아래의 생명이여. 나는 당신을 죽여서라도 진아를 데려가겠어.”
카일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후회하지 말라고. 카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더 이상 총구 속으로 스며드는 빛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가 입을 열었다.
“잘 가라ㄱ…….”
“왜 그렇게 필사적이지?”
계속 시선을 창밖에 고정한 채로 눈의 여왕이 물었다.
“에……?”
총구에서 노란 빛이 사라졌다. 카일이 당황스럽다는 듯 반응하자 눈의 여왕이 고개를 돌렸다.
“저 소란의 근원으로 가려는 것이 아닌가?”
차갑지만 흔들리는 눈에 카일이 머리를 긁었다.
‘전투에 왜 가려 하냐고?’
“죽을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카일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카일은 그 이유를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카일은 아버지를 따라 기관에 소속되었다. 어릴 적부터 배워온 것은 어둠은 적이라는 것과 그들을 없애야한다는 것. 카일은 이 전쟁에 그 이상의 의미를 두고 있지 않았다.
‘아버지는 할머니의 복수, 그 때문이라고 했던 것 같지만…….’
“너희 인간들은 두려움도 없느냐?! 푸른 달 아래의 아이들이 조금만 강하게 쳐도 죽을 나약한 몸뚱아리를 가진!!”
“그게 어쨌는데?”
하지만 카일은 기관의 모두가 전쟁에 두고 있는 가치를,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필사적이고 맹목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지금도 벨페스타에서 보호받으며 싸우는 법을, 지키는 법을 배우고 있을 녀석들도 나와서 손을 거들고 있을 거였다. 기관에 소속되지 않으려는 자는 봤어도 소속되고 난 이후에 나가려는 이들은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우리는 지키는 것을 위해 싸워. 그 가치는 모두가 다르지. 누구는 부모님을 위해 싸우고, 누구는 아이들을 위해 싸워. 누군가는 복수를 위해 싸우지만 궁극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하나다. 평화.”
“그것이 너희의 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카일은 총신을 손으로 쓸면서 입을 열었다.
“너는, 무언가를 이유를 따져가면서 갈망하나?”
눈의 여왕이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체험한다. 단순히 스카우트 된 녀석들도 전투에 한두 번 나가고 나면 뼈저리게 느끼지. 우리가 이런 힘을 가지게 된 이유. 우리의 수명을 깍아 내릴 것이 분명한 신성을 발하여 저 미지의 생명체와 싸우는 이유를. 거창한 이유 따윈 없어. 싸우겠다는 마음. 지키겠다는 의지. 그것만이 중요할 뿐이야.”
“이래서… 이래서 노란 달이 생명력을 상징한다는 건가? 제일 약한 달의 아래에 살면서도, 겨우 수백이 수백만의 생명을 지켜낼 수 있었던 이유가……?”
눈의 여왕이 고개를 숙였다.
“데려가라.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그 아이는, 변질된 푸른 달의 보석을 제련하여 만든 거울에 감염되었을 뿐이야. 내가 봉인한 추위와 기억은 되돌려 주지.”
진아의 몸에서 푸른빛이 흘러나왔다.
“기억해두는 게 좋아.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 내가 한건 추위를 느끼는 감각과 기억, 그뿐이니까.”
서둘러 달려가 힘을 잃고 쓰러지는 진아를 받아든 카일이 진아의 체온이 조금이나마 돌아오는 것을 느끼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따라와. 가고자 하는 곳, 그 근처로 데려다 주지.”
눈의 여왕이 허공에 손짓하자 얼음이 피어오르며 순록과 썰매의 모습을 갖추었다.
℘
“제길!”
전투는 급박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절반, 그 이상의 싱어들이 지쳐 나가떨어졌고 끝없이 부상자를 위해 결계를 생성하거나 균열을 메우던 드로어들도 정상이 아니었다. 전방에서 싸우고 있는 헌터들의 상황은 말할 것도 없이 최악이었다. 이미 수십의 헌터들이 상처입거나 무력화되어 후방으로 끌려 나와 있었다. 턱없이 부족한 싱어들의 수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병동에서 나오지 않는 파빌론 소속의 의사들까지 나와서 치료하고 있었다.
“젠장!! 왜, 왜, 왜!!”
체력이 좋은 듯 가장 많은 힘을 사용했음에도 힘을 발하고 있던 드로어가 깃펜을 집어던졌다. ‘챙강’하고 맑은 소리를 내며 깃펜과 그 끝에 달린 노란 보석이 바닥을 굴렀다.
“지키겠다고!! 이 땅은 우리의 것이란 말이야!! 넘보지 말란 말이다!!”
땀에 절어 아름답던 붉은 빛을 잃은 머리가 허공에 날렸다.
“지키겠다는데……지키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아니꼽냐!!”
남자가 절규한 그 순간 대지의 위를 구르던 남자의 노란 보석이 찬란하게 빛났다. 남자는 순간 피로가 풀리는 몸에 당황한 듯 손을 바라보았다.
“수고했다.”
머리를 누르는 강하지만 다정한 힘에 고개를 쳐든 남자의 눈앞에 깃펜이 있었다.
“어……?”
난데없이 시야를 메운 깃펜과 깃펜의 끝에 달린 노란 보석을 응시하던 그가 그것을 든 사람을 발견했다.
“마스터 드로어!!”
어디선가 들려오는 서아의 외침에 정신을 차린 그가 파닥 거리자 프레이어 마스터라 불린 이가 쿡쿡 웃었다.
“축하한다. 1급 드로어가 된 것을. 좋은 각오를 가지고 있나 보구나.하지만 조금 쉬어 두거라. 지금부터는 마스터들이 가담할 터이니. 늦어서 미안하구나.”
부드러운 남자의 음성이 소란스러운 전쟁터의 사이로 스며들었다. 전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그거 아느냐? 왜 어둠이 노란 달의 영역만 건드리는 지?”
아무 말 없이 썰매를 몰던 눈의 여왕이 물었다.
“알게 뭐야.”
“이곳이 근원이기 때문이다. 다른 두 달의 영역은 허상에 가깝지. 도착했군. 내려라. 노란 달의 아래에서 숨 쉬는 아이여.”
대지에 부드럽게 착륙한 썰매에서 카일이 내렸다. 그의 품 안에 잠들어 있는 진아를 바라보던 눈의 여왕이 씁쓸하게 웃었다.
“무운을 빌지.”
순식간에 하늘로 날아올라 멀어져버리는 여왕을 보며 카일이 머리를 헤집었다. 진아는 아직도 자고 있었다. 멀리서 느껴지는 강한 파동에 카일이 몸을 떨었다.
“어이, 장진아? 좀 일어나 보지?”
조심스럽게 진아를 흔드는 카일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잠시 후 천천히 진아의 푸른 눈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카…일?”
“오, 다행이네. 막 일어났는데 미안하지만 얼른 가자고. 예상이긴 하지만 저기 박 터지고 있을 걸?”
카일의 손을 따라 한쪽을 본 진아가 눈을 부릅떴다.
“잠이 확 깨네. 젠장.”
씹어 먹을 듯 욕을 하는 진아를 본 카일이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모든 걸 삐뚤어지게 보고 언사도 거칠어진 진아가 적응이 안 됐다.
“뭐해, 안 가?”
“어? 어어. 가야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진아를 보고 카일이 멍하게 답했다.
“바보 같기는.”
휙 돌아서는 진아의 분홍 머리칼이 허공을 수놓았다.
마스터들이 동참하자 어느 정도 여유가 찾아왔다. 전원 0급, 4개로 나누어진 헌터와 프레이어들의 정상에 위치한 이들의 힘은 강력했다. 네 명의 1급 싱어가 달라붙어야 치유가 가능하던 이의 상처도, 1급의 드로어 3명이 달라붙어 복구한 결계의 일부를 순식간에 복구했으며 변이되어 날뛰는 어둠마저 간단히 정리했다. 기관의 무력을 상징한다는 그 위명에 어울리는 힘과 여유에 모든 헌터와 프레이어들이 이를 악물었다. 단 네 명의 합류로 소강상태에 접어드니 싶던 전투의 판도가 한순간 뒤집혔다. 부서진 결계의 틈으로 나타난 거대한 쇠사슬이 전장을 휩쓸었다. 드로어들의 결계까지 무참히 박살낸 그 쇠사슬은 계속해서 움직이며 모두를 공격했다.
“휘유…. 저게 뭐야.”
마스터 거너가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리자 곁에 서있던 다른 마스터 거너가 핀잔을 줬다.
“알 리가 있냐, 멍청아.”
“어라 지금 한 ㅍ…….”
-치직. 피하세요!!! 치직. 왕이예요. 치직. 어둠의 왕. 치직. 이라구요!
두 마스터가 눈을 깜박이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치직. 하늘을. 치직. 보세요! 치직. 결계사이로. 치직. 왕의. 치직. 팔이!!
“아아. 봤어, 시끄러우니까 그만 말해, 랩의 리더. 망했네. 왕까지라면 우리도 별 수가 없다고. 류에에에엘!!”
마스터 거너가 소리 높여 외치가 한쪽에서 결계복구에 여념이 없던 마스터 드로어가 고개를 들었다. 그가 반응한 것을 확인한 마스터 거너가 다시 외쳤다.
“드로어 몽땅!!!!! 결계 복구해!!!! 몸체가 다 나오면!!!!! 끝이야!!!!”
마스터 드로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에 있던 서아에게 속삭였다.
-치직. 드로어 전원. 치직. 복구에 집중!!!!
-반복. 치직. 한다!! 복구에 집중!!!! 치직.
단말기에서 서아의 음성이 나오는 것을 들으며 마스터 헌터가 총구를 들었다. 결계의 파손부위에 나와 있는 왕의 팔을 겨냥한 그가 즉시 탄을 쏘았다.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허공을 찢어발기며 왕의 팔에 명중했다.
뛰어가면서 카일이 계속해서 단말기를 두드렸지만 극심한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눈의 여왕과 싸울 때 부서졌는지 작동을 하지 않았다. 한숨을 쉬며 전장으로 뛰어드는 진아를 쳐다본 카일이 굳어버렸다. 결계가 부서져 흉측하게 드러난 검은 영역에 노란 빛의 탄환이 정확히 박혀들었다. 탄환의 여파가 사라지기 무섭게 굵은 쇠사슬이 튀어나왔다. 쇠사슬은 넓게 전장을 휩쓸며 진아에게 날아들었다.
“장진아!!!!!!!!!!!”
진아는 쇠사슬을 보고는 피할 수 가 없었다.
‘저게 왜…….’
세 가지 색으로 빛나는 사슬은 어둠의 왕을 봉인한 증거물이었다. 과
거 하얀 달의 영역이 펼쳐졌을 때, 최초의 싱어가 부르기 시작한 노래, 이제는 가사조차 전해지지 않는 ‘The Song of Moon’이 모두의 노래와 기원에 공명하며 달의 보석들로 만들어 냈다는 봉인의 쇠사슬. 만든 이들의 바람과는 달리 그들의 후손을 위협하는 쇠사슬에 진아는 얼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체념했다. 피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현실을 직시한 진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한참이 지나도 오지 않는 고통에 진아가 눈을 떴을 때, 단 한사람만이 눈에 들어왔다. 웃고 있는 카일의 입에서 피가 한줄기 흘러내렸다.
“바보… 안… 다쳤……?”
무너지는 카일의 등을 본 진아의 눈이 커졌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파인 카일의 등에 얼어붙어 흘러서는 안 되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뺨을 가득 적시며 흘러내리는 눈물 사이로 기괴한 푸른빛을 내는 조각이 섞여 흘러내렸다.
“카… 카일?”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카일을 건드리던 진아가 심장을 쥐고 주저앉았다.
“이…일어나봐!! 카일!!!!!!!”
쇠사슬의 반경에서 벗어나 구호활동을 지속하던 파빌론의 의사들이 달려왔다. 진아와 카일의 옷을 본 그들은 서둘러 의료도구를 쥐며 진아를 떼어냈다.
“저희에게 맡기세요, 헌터님.”
잘게 떨리는 진아의 눈을 쳐다본 파빌론의 의사 하나가 한숨 쉬었다.
“계속 그러고 계실 겁니까? 이분을 살려야죠.”
“아… 아아…….”
주춤거리며 진아가 물러서자 의사들이 달라붙었다. 그들의 몸이 카일을 가리자 진아는 허공에 난 검은 구멍을 바라보았다.
‘싫어.’
‘야아~ 장진아! 그러지 말고 한번만 대련해 주라, 응?’
‘벨페스타 내에서 개인 간의 대련은 금지되어 있어!’
‘그럼, 이번에 시험에 통과하면 해줄래? 아니면 나 계속 달라붙는다?’
‘알았어, 알았다고!’
카일과의 기억이 흘러지나갔다. 조용히 진아의 심장에서 흉측한 푸른빛이 떨어졌다.
“용서 안 해. 아직 그와 대련을 해주지 못했다고.”
진아가 전장의 한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서아는 드로어들을 모으는 마스터 드로어가 있는 쪽을 힐끗거렸다.
전장은 불리하게 돌아갔다. 전투가 가능한 인원이 빠르게 줄어들었고 부상자가 된 그들을 지켜야 하는 인원을 늘어났다. 어느 순간부터 후방의 싱어와 드로어들, 그리고 부상자의 호위를 트리뷰널의 추격자들이 맡고 싱어들의 역할을 도울 파빌론의 의료진들까지 동원되었지만 불리하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진아가 도착한다고 해도 승산이 없을 것 같았다.
‘그녀가 마스터가 되기에는 연륜이 부족하다.’
어이없는 이유로 인해 그 무력을 무시당한 장진아. 그녀의 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나이만 좀 더 많았다면 이견 없이 마스터 헌터가 되었을 정도로.
서아가 피로한 눈을 문질렀다. 튀어나오는 어둠도 어둠이지만 계속해서 광대한 영역을 공격하는 굵은 쇠사슬도 문제였다. 일순간 전장에 노란빛의 반월이 지나갔다.
“어……?”
반경 내의 어둠이 모조리 양단되자 싱어들이 노래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보랏빛 입자가 퍼지기 시작하자 마스터 싱어가 급하게 노래를 불렀다.
“천년의 노래가 시작되는 곳. 이곳에 모두의 꿈이 잠이 들었네. 모두가 빛나는 세계의 꿈. 모든 것이 이곳에 잠이 들었네.”
빠른 속도로 퍼져나간 빛이 보랏빛 가루로 분해되는 어둠들을 감싸정화시키자 싱어들도 허겁지겁 노래를 시작했다.
“빛나는 반월? 진아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을 살피는 서아의 눈에 희망이 깃들었다. 미친 듯이 어둠을 베어 넘기는 진아를 보며 서아는 안도감에 눈물 흘렸다. 모두가 외면한 천재, 그것이 바로 진아였다.
‘아저씨를 따라가면 지킬 수 있어요?’
아빠와, 전전대 트리뷰널의 수장과 함께 만난 진아의 눈을 잊지 못한다.
‘아저씨를 따라가면 나같이 가족을 잃는 사람이 없게 할 수 있어요?’
‘흠, 약속은 못하겠구나. 하지만 이것 단 하나만은 약속하마. 너는 힘을 지닐 거다. 모두를 지킬 수 있을지 없을지는 너의 몫이야.’
‘따라갈래요.’
지킨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싸우는 진아는 그 누구보다 돋보였다. 아름다운 연분홍의 머리를 휘날리며 가차 없이 어둠을 베는 진아는 그 누구보다 매혹적이었다.
‘서아야. 아빠는 진아를 찾은 것이 이 기관에서 한 일들 중 제일 자랑스럽다. 보렴. 단단한 의지와 강철과도 같은 신념을 지니고 지키고 싶은 것을 위해 싸우는 이의 아름다움을.’
“역시 대단하네요. 20대에 마스터 후보가 될 만 해요. 그러고 보니, 최초의 1급이었죠?”
“응. 벨페스타를 졸업함과 동시에 1급이 된 헌터는 그녀가 유일하지.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옆에 서있던 랩의 연구원이 중얼거리자 서아가 답했다.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자는 아름다워. 그게 소중하면 소중할수록.”
“좋아, 드로어들. 이번 한방으로 끝낸다. 3급들은 가장자리를 노려서 복구를 진행한다. 2급들은 조금 더 안쪽을. 1급들은 중앙 주변을. 그리고 0급인 나는 중심을. 싱어들은 우리를 지원해 줘.”
싱어들이 숨을 들이키는 것을 시작으로 드로어들이 저마다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누구는 글귀를, 누구는 원진을, 누구는 그림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려진 빛의 궤적은 완성되는 즉시 거대한 바늘이 되어 결계를 복구했다. 넓은 지역에 퍼져있던 싱어들 대부분의 치유력이 한 곳에 집중되자 드로어들은 피로를 잊고 끝없이 손을 움직였다. 쇠사슬이 다시 한 번 튀어나오려다 복구되어가는 틈에 걸려 나오지 못하자 헌터들도 아낌없이 힘을 발휘했다. 빠른 속도로 어둠이 정리되자 마스터 거너가 소리 질렀다.
“어이~ 장진아! 광역으로 한 번 더 쓸어버릴 수 있냐?!”
시끄러운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마스터 거너가 총구의 균열 상태를 확인하고는 비스듬하게 오른쪽을 겨냥했다. 조금 더 떨어진 곳에서 총을 갈기던 또 다른 마스터 거너 헌터도 공격을 멈추고는 마스터 헌터와 반대로 비스듬하게 왼쪽을 겨냥했다.
“1,2,3급들은 전원 대피!”
그의 말을 끝을 맺자마자 어마어마한 빛이 두 마스터의 총구 속으로 스며들었다. 진아는 두 마스터의 중간에 서서 천천히 칼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자세를 낮추고 눈을 감았다. 진아는 달의 보석과의 동조율이 굉장히 좋았다. 마스터라는 호칭을 지니는 단 4명만이 소속되는 0급을 일반 헌터가 지닐 정도로. 그리고 현재 헌터들 중 마스터의 칭호를 지닌 둘이 모두 다 거너였다. 즉, 현재 존재하는 소더들 중 최강자. 여러 가지로 최초라는 수식어를 몰고 다니는 존재가 바로 그녀였다. 굉음과 함께 거대한 노란 빛의 탄환이 쏘아져 나갔다. 그리고 그 뒤를 거대한 반월이 뒤 쫓았다. 완벽에 가까운 타이밍에 어둠들은 피할 곳조차 얻지 못하고 동강났다. 드로어를 지원하지 않고 있던 대기하던 칸티규 소속의 싱어들이 입을 열었다. 그들의 주특기는 광역 정화였고, 정기적으로 세계단위로 정화를 행하는 그들답게 강력한 정화의 빛이 전장을 휩쓸었다. 정화의 빛이 잦아들 무렵, 드로어들이 그려내는 빛의 향연이 멈췄다. 허공의 균열은 사라진 상태였고 드로어들은 탈진해서 주저앉아 있었다.
“끝…이다.”
누군가가 중얼거리는 말에 모두가 허망하게 웃어버렸다. 거대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전쟁은 싱겁게 끝나버렸다.
“그런데 복구, 성공한 건가?”
마스터 거너가 중얼거리자 마스터 드로어가 입을 열었다.
“아니, 나이스 타이밍이랄까?”
둘의 대화에 집중하던 모두가 고개를 갸웃 거렸다. 마스터 드로어가웃으며 하늘위로 손을 뻗었다.
“Festival of The White Moon(하얀 달의 축제)가 시작되었어. 달이 합쳐지기 위해 엉망이 되었던 결계는 달이 하나가 됨으로서 탄탄해졌어.”
“어쨌든, 결계는 자체 복구 되었다는 소리지?”
“빙고, 정답이야.”
마스터 드로어와 마스터 거너의 만담아닌 만담에 모두가 허망하다는 듯 한숨 쉬었다.
“자-! 모두 수고했어요.”
서아가 박수를 쳐 모두의 시선을 모았다.
“이제 본부로 돌아갈까요? 우리도 좀 쉬자고요.”
어깨를 으쓱이는 그녀의 행동에 모두가 웃으며 무기를 챙겨들었다.
℘
“진아 언니!”
누군가의 부름에 멍하니 하늘을 보던 진아가 몸을 돌렸다. 황금색 머리로 푸른 하늘을 수놓으며 한 소녀가 뛰어왔다.
“그러다가 다쳐, 아일라.”
“헤헤헤, 여기서 뭐해요?”
어색하게 미소를 짓는 그녀를 보고는 진아가 웃어버렸다.
“무덤.”
난간으로 다가간 진아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우뚝 선 거대한 비석을 바라보았다.
“아아, 순교자들의 비석. 우리 팀은 아무도 이름 안 올려서 다행이예요, 그쵸?”
기관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본부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거대한 비석은 헌터와 프레이어, 그리고 기관에 소속되어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죽어간 모두의 무덤이었다. 시체를 남기지 않아야 한다는 규칙에 따라 화장해버리는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비석.
“모두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야.”
“언니는 죽음에 익숙해 진거예요?”
“응?”
무슨 말이냐는 듯 물어오는 그녀와 시선을 맞춘 아일라가 입을 열었다.
“엄청나게 죽었잖아요. 근데 언니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아서.”
“흐음. 뭐랄까. 아무렇지도 않은 게 아냐. 그냥, 담담한 척 하는 거지. 저들은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것을 위해 몸을 던졌고, 그것은 용기있는 일이며 가치 있는 일이야. 결국 죽음으로 이어졌다고 해도. 나는 그것을 부정할 생각이 없어.”
“결국은 죽었다는 것이잖아요.”
“아일라. 너는 무엇을 위해 노래를 부르지?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신성을 몸에 담고서. 너의 목숨을 갉아먹으면서 말이야.”
진아가 아일라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양 손을 잡고 눈을 맞추었다.
“난… 아빠를 잃었어요. 엄마가 나를 낳으면서 죽었거든요. 아빠가 다였는데 허공을 떠돌던 어둠에 감염되어서 운도 없이 정화되지 못하고. 숙주가 되어서 변이되기 시작해서…….”
진아는 아일라가 흘리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이성을 잃어가면서도 아빠는 나를 지키려고 했어요. 나를 죽이면 편해졌을 텐데. 그래서 나도 지키고 싶어서. 아빠처럼…….”
진아가 미소를 지었다.
“죽은 이들도 마찬가지야. 기관에서 너처럼 아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을까. 우리는 저들을 동정해서는 안 돼. 우리는 그들을 잊어서는 안 돼.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잊어야하지. 아일라, 기억해. 우리는 죽음에 익숙해 져야해. 우리는 목숨을 담보로 신성을 가져와 모두를 지켜. 그건 우리가 선택한 길이야. 아무도 아프지 않도록. 적어도 우리가 지킬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아무도 아프지 않도록.”
“네…….”
아일라가 거칠게 눈물을 닦았다.
“아일라 양! 진아 씨! 카일 씨가 깨어났대요!!!”
잔뜩 흥분한 하운의 외침에 진아가 손을 내밀었다.
“자, 갈까? 가서 놀려주자고. 저 멍청한 거너를.”
“응, 언니.”
하늘은 시리게 푸르렀다. 죽어간 이들은 추억 속으로 잠이 들었고, 살아남은 이들은 다시 한 번 자신의 무기를 점검했다. 전쟁은 끝나지않을 것이니까. 잠시간의 평화를 가져다 준 하얀 달의 시간이 지나가면 다시 전쟁이 시작될 터였다.
1) 소더(Sworder) : 전투 직종인 헌터(Hunter)의 한 갈래. 검을 들고 어둠을 격살하는 존재들을 말한다. 검 외의 냉병기를 이용해 싸우는 이들 전체를 소더라고 칭한다. 일반적으로 동급의 거너들에 비해 2배가량 강력한 힘을 보유한다. 거너에 비해 수가 절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2) 거너(Gunner) : 전투 직종인 헌터(Hunter)의 한 갈래. 총을 들고 어둠을 격살하는 존재들을 말한다. 권총에서부터 저격총까지 사용하는 총기류는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동급의 소더들에 비해 2배가량 약하다.
3) 싱어(Singer) : 보조 직종인 프레이어(Prayer)의 한 갈래. 목소리를 매개로 치유와 정화를 할 수 있다. 매개가 되는 것은 사람에 따라 기도, 노래, 속삭임 등 다양하다.
4) 드로어(Drawer) : 보조 직종인 프레이어(Prayer)의 한 갈래. 무언가를 쓰거나 그리는 것을 매개로 결계 형성과 결계 복구를 할 수 있다.
5) 이름 없는 기관 : 어둠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려고 하는 단체. 이름이 없기때문에 기관, 혹은 노-네임(No-name)으로 불린다.
6) 트리뷰널(Tribunal) : 이름 없는 기관의 주요부서 중 하나. 사법적 문제를 포함하여 기관에 들어가길 희망하는 자를 심사한다.
7) 랩(Lab) : 이름 없는 기관이 중요 부서 중 하나. 통상적인 과학기술보다 몇십년 앞선 기술을 보유했다고 알려져 있다. 헌터(Hunter)와 프레이어(Prayer)를 전장으로 보내고 관리하는 일도 겸임하고 있다.
8) 세네트(Senate) : 이름 없는 기관의 중요 부서 중 하나. 7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계의 원로들로 구성된 원로회.
9) 마스터 팀 : 헌터(Hunter)와 프레이어(Prayer)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4명으로 구성된 팀이다. 거너와 소더 각각 한명, 싱어와 드로어 각각 한명, 총 4명으로 구성되는 것이 기본이나 항상 소더의 수가 부족해 헌터의 경우 거너 2인으로 구성되는 것이 보통이다.
10) 왕 : 하얀 달이 3개의 달로 나누어질 때 함께 태어난 것으로 전해지는 이들.
11) 칸티큐: 이름 없는 기관의 중요 부서 중 하나. 전원 싱어로 구성되어 있으며 의료팀에서 관리하는 어둠에게 감염자를 비롯하여 주기적으로 전 세계를 정화하고 있다.
12) 벨페스타 : 이름 없는 기관이 중요 부서 중 하나. 부상당한 이들의 사후를 책임지고 신입의 교육을 담당해 재능을 개발시킨다. 적절한 부서에 배치하는 것도 그들의 업무다.
13) 알비테 : 공방. 이름 없는 기관이 중요 부서 중 하나인 랩의 산하 조직. 헌터들의 무구를 생산한다.
14)파빌론 : 랩 산하 조직으로 치료 행위와 치료와 관련된 연구를 담당한다. 어둠과 관련된 모든 부상, 감염을 치료한다.
2. [Ce trois Lune _ 그래도 환상이 남아있던 시절] Grand Amour
1.
바람은 고개를 돌렸다. 밤이 주는 고요함을 품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꺼지지 않는 불빛의 화려함을 택한 도시를 지나온 바람은 조용히 도시를 한 바퀴 삥 돌았다. 고요한 밤이지만 더없이 화려한 불빛과, 끝없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지켜본 바람은 조용히 도시를 뒤로했다. 한없이 자유롭고 끝나지 않는 바람은 조용히 다른 도시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바람이 지나간 것도 모른 채 도시는 화려한 빛만을 토해내고 있었다.
방의 한 면을 채우고 있는 긴 책상과 책상 위를 따라 설치된 세 칸의 긴 책장, 그리고 그 안을 채운 액자와 책들, 책장위에 빼죽 고개를 내밀고 있는 인형들로 아기자기한 방안은 평소의 조용함을 버리고 부산함을 한껏 품고 있었다. 언제나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침대위로 내팽개쳐진 잠옷과 밖으로 돌출된 창에 설치된 작은 공간에 깔린 푹신한 쿠션위로는 온갖 액세서리들이 굴러다녔다. 방 한쪽에 설치된 전신거울 앞에서 연신 리본을 예쁘게 고쳐 매는 작은 소녀가 서있었다. 꾸민 이의 배려와 사랑이 가득한 공간에서 살기 때문일까, 발그레한 뺨이 사랑스러운 소녀는 발을 동동 굴리며 리본을 만지작거렸다.
“가온아, 얼른 안 내려오면 늦을지도 몰라!”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엄마의 목소리에 가온은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리본을 다시 풀었다.
“엄마, 어떻게!! 리본이 예쁘게 안 돼!!”
“내려오면 엄마가 해 줄게. 어서 내려오렴.”
엄마의 외침에 가온은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근처에서 예쁘기로 소문난 고등학교에 교복이었다. 검은 색에 가까운 진한 갈색의 마이는 다이고 안에 입는 블라우스는 깨끗한 흰색에 브라운 톤의 체크치마, 목에 매는 브라운색 리본, 그리고 잠그지 않아 열린 마이사이로 보이는 짙은 갈색 니트 조끼. 가온은 모난데 없이 깔끔하게 정리된 모양새에 고개를 끄덕이며 마이를 잠갔다. 이열로 되어있는 마이 단추에 교복이 아닌 사복을 입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고등학생!’
만년 중학생 일 것만 같은 기분이었는데 어느새 고등학생이 된다니 설레고 조금 걱정도 되었다. 고등학교는 하루 종일 공부만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대학교가 가까워진다고 생각하니 조금 가기 싫어지기도 했다.
“가온아! 입학식 늦겠어!!”
다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에 가온은 놀라서 바닥에 놓여있던 검은색 가방을 들고 1층으로 내려갔다. 가온이 내려간 방안은 가온이 아침부터 얼마나 부산했는지 보여주는 흔적들만이 남아있었다.
-헤에, 특이한 인간이네. 고등학교 가는 게 어떻다고 저 난리람?
아무도 없어야 정상인 방안에 기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장난기 넘치지만 동시에 힘 있는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에 반응할 사람은 방안에 없었다. 방에서 보이는 창밖으로 한 마리 의 새가 날아갔다.
“가온아, 왜 이렇게 오래 걸리니.”
솜씨 좋게 리본을 묶어주는 엄마의 손을 바라보면서 가온은 입을 쭉 내밀었다.
“나는 엄마처럼 솜씨가 없는 걸. 엄마는 어떻게 이런걸 잘 하는 거야? 엄청 신기해.”
딸아이의 툴툴거림을 듣던 가온의 엄마는 새삼스럽게 가온의 변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릴 적에는 작고 연약해서 조금만 찬바람이 불어도 감기로 한참을 고생하던 딸을 생각하면 이렇게 고등학교를 간다는 것이 믿기질 않았다. 단정하게 입은 교복과 어깨에서 찰랑거리는 얇지만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보면서 그저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녀에게는 이 순간이 너무도 신기했다.
“얼른 학교가. 첫날부터 지각하면 큰일 난다.”
저를 어린아이 취급하며 엉덩이를 톡톡 두들기는 엄마의 손길에 투덜거리던 가온이 시계를 힐끗 보곤 밖으로 달려 나갔다.
“다녀오겠습니다!!”
기운 넘치게 인사하는 가온을 보면서 그녀는 피식 웃었다. 어느 때와 다름없이 평범한, 하지만 조금 특별한 하루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2.
학교에서의 입학식은 중학교 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때와 같이 지루했다. 달라진 것은 더 이상 가온이 중학색이 아니라는 것과 달라진 교복, 달라진 아이들, 달라진 선생님뿐이었다. 가온은 신입생 대표로 불린 소녀가 앞으로 나가는 것을 바라본 뒤, 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어?”
가온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꺄르륵 웃는 어린아이를 봤다고 생각했다.
“학생, 집중해.”
나지막이 들려오는 선생님의 말에 가온을 앞을 봤다가 슬쩍 눈을 돌렸다. 아까 본 아이는 허상이라는 듯 아무것도 없었다. 입학식이 끝이 나고 반에 들어가 담임선생님을 만나고, 자리를 배정받은 가온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침의 두근거리는 마음은 모두 꿈이라는 듯 지루하기만한 시간에 가온은 입을 쭉 내밀었다.
‘이게 뭐야, 그냥 중학교랑 다른 게 하나도 없잖아.’
투덜거리며 하늘을 바라보던 가온의 눈에 또다시 이상한 것이 보였다. 하늘에서 장난치고 있는 작은 두 아이들. 가온의 눈이 커지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을 때 반으로 선생님이 들어왔다. 그에 고개를 돌려 선생님을 바라본 가온이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을 때,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선생님이 출석을 부르기 시작하고 가온은 거기에 집중했다.
3.
꽃샘추위가 잠시 물러난 어느 봄날, 새로운 학교에 동동거리며 행복해하고 또 조금 걱정하던 작은 소녀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또 흘러서 봄이 찾아왔다. 학교에는 아름다운 벚꽃비가 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양이 강렬하게 빛나는 여름이 찾아오고, 날이 차가워지며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이 지나고, 눈이 내리는 겨울이 지났다. 시간은 빠르고 또 조용히 흘러갔고, 소녀는 그만큼 자라났다. 더는 새로운 학기의 시작에 두근거리지도 않고 리본이 예쁘게 묶이지 않는다고 툴툴 거리지도 않았다. 그녀의 엄마는 딸의 성장을 기쁘게 받아들였고 그것은 당연하다는 듯 일상이 되었다. 입학식 날에 봤던 환상과도 같은 작은 어린아이들은 가온의 기억 속에서 천천히, 희미해져 갔다. 가온이 그 어린아이들을 기억해낸 것은 좀 더 시간이 지난 어느 봄, 가온이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어느 날이었다.
“꺄악?!”
교복을 입고 리본을 목에 걸치고 1층으로 내려오던 가온은 갑자기 뒤에서 끌어안아오는 큰 손에 깜짝 놀랐다.
“어이쿠, 우리 딸. 엄청 컸는걸! 이제 아빠가 들지도 못하겠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가온을 번쩍 들어 공중에서 한 바퀴 도는 남자의 모습을 본 가온이 소리 질렀다.
“아빠!!”
딸의 부름에 기분이 좋다는 듯 확 끌어안은 남자가 갑자기 가온을 풀어주고는 거실에 널브러져 있던 캐리어로 다가갔다.
“우리 딸, 아빠가 선물 사왔지!”
근 이년 만에 보는 아빠가 너무 반가웠던 가온은 치마를 입었다는 것은 까맣게 잊어버리곤 아빠의 등에 매달렸다.
“아이참, 아빠 언제 온 거야? 왜 말 안했어?”
“오늘 새벽에 왔어. 가온아, 어서 아침 먹어, 학교 늦겠다. 당신도 어서 앉아요! 이년만의 딸과의 아침식사를 짐을 뒤지느라 허비하고 싶지는 않죠?”
가방을 헤집어 거실을 엉망으로 만드는 아빠를 보며 엄마가 으름장을 놓자 아빠는 화들짝 일어나서는 부엌으로 향했다.
“물론이지! 선물은 이따가 찾도록 할까?”
능청스럽게 식탁으로 다가와 앉는 아빠의 모습에 가온은 오랜만에 활짝 웃었다. 언제나 따뜻하지만 조용했던 집에 소란함이 감돌았다. 단 한사람이 더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꽉 찬 느낌을 주는 집에 가온은 정말로 행복했다.
“그럼 다녀와 우리 이쁜 딸!”
활짝 웃으며 배웅하는 아빠를 뒤로하고 문을 닫은 가온은 심호흡을 하곤 신발코로 바닥을 톡톡 쳤다.
“우와……. 아빠가 올 줄은 꿈에도 몰랐네. 그래도 너무 좋다.”
-그렇게 좋아?
뺨을 붉게 물들이며 기뻐하던 가온의 귀로 처음 듣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라고 하기에는 머릿속에 바로 울리는 듯한 소리에 가온은 몸을 가볍게 떨었다.
“누…누구?”
-얍! 안녕?
가온이 주변을 돌아보는데 같은 목소리가 위를 보라고 재촉했다. 그 말에 따른 가온은 졸라서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귀…귀신?!”
-으엑? 설마, 귀신이겠어?! 너 진짜 둔하다! 어떻게 이년을 쫓아다녀도 몰라?
쪼잘거리는 상대를 바라보던 가온은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작은 소년이었다. 토실토실한 뺨과 곱슬거리는 녹색 머리카락, 공중에 떠있음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는 옷. 기묘하지만 또 사랑스러운 모습에 넋을 잃었던 가온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학교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혼자 악을 쓰며 학교로 향하는 가온을 보던 소년이 휙 몸을 돌렸다.
-헤, 쟤 왜 저래?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소년의 허망하고 어이없고 당황스럽다는 명백하게 드러내는 표정을 보던 가온의 아빠가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그런 표정인 것도 오랜만에 보는 걸? 역시 우리 딸이야.”
-역시 부녀지간답게 둘 다 어이없네. 왜 널 닮은 거래?
“하하하, 당연히 내 딸이니까, 그렇지!”
당당하게 외치는 말에 소년이 허공으로 날아올라 가온의 아빠의 머리를 쿡 하고 밟았다,
-시끄럽고, 왜 아무것도 모르냐니까? 날 보고 귀신이래. 어이없다, 진짜.
“그야 아무것도 말 안 해줬는걸? 솔직히 내 입장에선 벌써부터 본다는 게 달갑지 않아. 가온이는 좀 더 평온한 일상을 즐기길 바랐다고.”
억울함과 화가 담긴 중얼거림에 소년은 피식 웃으며 밟고 있던 머리를 더욱 꾹꾹 눌렀다.
-그래서 넌 지금 안 평온하다 이거지, 응? 반항이냐? 반항이야?
“너 때매 우리 이쁜 딸의 입학식을 못 봤잖아!!!!”
머리 위를 휘저어 소년을 떼어낸 가온의 아빠가 소리를 빽 질렀다. 또 엄청나게 억울하다는 목소리에 핑하고 콧방귀를 낀 소년은 허공에 주저앉아서 팔짱을 꼈다.
-그래서 안 가르쳐 줄 거야? 도태되면 죽어. 무지는 죄악이야. 그런 방식으로 딸을 포기할 건가?
소년이 안경너머의 눈을 응시했다. 고등학생인 딸을 두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은 외모, 40대는 족히 되었을 나이지만 기껏해야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굽슬거리는 검은 머리를 지닌 남자가 안경을 매만졌다. 얇은 와이셔츠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몸은 결코 나이가 많은 아저씨의 몸이 아니었다. 보통의 사람들과는 달리 곧게 펴져있는 허리는 남자의 키를 더 커보이게 만들었다.
-대답해, 한 경현. 이건 정말로 중요한 문제라고.
“너도 알잖아, 카인. 가온이는 몸이 약해.”
-건강해지라고 무술을 가르친 건 너야, 잊으면 곤란해. 냉정한 소년, 카인의 말에 가온의 아빠, 경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나도 가온이가 나와 같이 움직이면 좋겠어. 제 자식들과 팀을 이뤄서 다니는 다른 녀석들이 부러운 건 나도 마찬가지라고. 그런데 어떻게 해. 내가 뭘 해야 하는데? 가온이는 여자애야. 나는 좀 더 편하게 살게 해주고 싶어.”
-그건 헛된 바람에 불과해. 그 애는 너의 피를 이었고. 자연의 아이들을 본다. 아직 약하지만 그건 아마도 스스로 알고 있지 않기 때문이겠지.
경현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나도 알고 있어. 그렇게 잔인하게 굴지 말란 말이야, 카인’
밖으로 새어나오지 못하는 말이 입안에서 부서졌다. 남자는 오랜만에 찾아온 휴식의 한 가운데에서 그 무엇보다 무거운 고민을 짊어졌다.
4.
학교에서 가온은 유명했다. 성격이 나쁘다거나 하는 그다지 좋지 않은 이유들 때문은 아니었다. 가온은 누구에게나 친절했고 상냥했으며 진정으로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상처를 어루어 만지는 법을 알고 있었다. 가온에게 털어놓은 비밀은 절대로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았다. 선생님들은 언제나 수업에 집중하고 매사에 열심히인 가온을 이뻐했다. 가온을 잘 아는 아이들은 가온이 사랑받을 만한 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 점에서 오늘 아침, 시무룩한 가온의 모습은 늘 밝은 모습만 알고 있던 아이들에게는 굉장히 걱정되고 또 신기한 일이었다. 서로가 가온에게 물어보라고 옆구리를 찔렀지만 쉽사리 다가서지는 못했다. 그것은 점심시간까지 이어졌다. 선생님들은 수업에 집중을 못하는 가온을 보면서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늘 성실했기 때문에 무슨 문제가 있겠거니 하면서 은근슬쩍 넘어가 주었다. 하지만 점심시간이 되자 아이들은 웅성거리며 가온을 둘러쌌다.
“흠흠, 가온아?”
반장인 아이가 대표로 가온을 건드렸다.
“에, 응?!”
화들짝 놀라는 가온의 모습에 더 놀란 아이들이 한걸음 물러섰다.
“점심시간이야. 밥 먹으러 가자고. 다들 기운이 없어서 걱정하고 있기도하고 말이야.”
반장이 어깨를 으쓱이며 주변을 가리키자 지목당한 아이들이 하하 웃으며 머쓱해했다.
“아니, 뭐. 가온이는 늘 우리 고민 들어주고 그러잖아. 그러니까 힘들면 우리한테 기대도 된다. 이 말씀이지.”
말썽꾸러기로 유명한 아이가 말하자 주변에서 ‘제법인데’라며 아이를 툭툭 쳤다. 친구들의 손길에 앞으로 나온 아이가 가온이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니까 밥 먹으러가자! 우울할 땐 밥이지!!! 식당으로 렛츠 고~~!!!!!!”
힘껏 외치며 식당을 향해 달려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가온이 피식 웃었다.
“응, 가자!”
“이래야 우리의 아이돌 가온이 답지!!!”
복도를 달려가는 한 무리의 아이들에게 경고를 주려던 선생님은 계속 우울한 표정이던 가온이가 해맑게 웃고 있는 것을 발견하곤 은근슬쩍 교무실로 들어가며 가온이 이제 웃고 있네요. 라고 전하자 선생님들 이 다들 잘 되었다며 웃었다. 가온은 여러 가지 의미로 모두에게 사랑받고 있었다.
5.
“무슨 일이예요?”
기운이 없는 상태로 집에 들어와 소파에 널브러지는 남편을 바라보며 가온의 엄마가 물었다.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경현이 일어나 앉으며 옆을 툭툭 두드렸다. 명백히 앉아보라는 의사를 전달하는 남편의 모습에 하던 것을 멈추고 자리에 앉아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이예요, 말해 봐요. 고민은 나누면 반이 된다잖아요.”
“있지. 가온이는 모르잖아.”
“뭘요?”
“당신이 싱어1)라는 것도. 내가 시커2)라는 것도. 말해도 될지 모르겠어.”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리듯 말하다가 고개를 들고 소리를 지르는 그를 보면서 가온의 엄마가 표하고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게 고민이었어요?”
정말 바보 같다며 웃는 아내를 바라보는 경현의 눈이 흔들렸다.
“아무렇지도 않아? 유미, 너도 다쳐서 그만둔 거잖아! 다리의 반이 날아갔어. 심지어 넌 전투하는 헌터3)도 아니었다고! 가온이는 나처럼 시커가 될 거야. 그 아이도 카인을 본다고. 헌터는 프레이어4)보다 천배는 위험해! 갓 헌터가 된 녀석들의 생존율은…!”
“쉿.”
가온의 엄마, 유미가 손으로 경현의 입을 꾹 눌렀다. 부드럽게 웃는 유미의 미소에 경현의 기세가 누그러졌다.
“알아요. 알고 있어요.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죠. 우리는 위험을 곁에 두고 살아요. 가온이도 그런 삶을 사는 것. 나도 바라지 않아요. 그런데 가온이는 이 사실을 아나요? 가온이는 우리의 딸이에요. 제로 헌터5)인 한 경현과 정 유미의 딸이에요. 그 아이는 마냥 약하지 않아요. 믿어요, 당신과 나의 딸이잖아요.”
부드럽게 웃으며 말하는 유미의 말에 경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쪽 구석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카인이 콧방귀를 꼈다.
-결국 저럴 거면서 그 난리였냐. 공처가 같으니.
6.
집에 돌아온 가온은 뭔가 이상한 기류가 흐르는 집의 모습에 한껏 긴장하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늘처럼 고요하지만 기분 나쁜 적막감이 흐르는 집은 낯설다못해 소름이 끼쳤다. 가온이 조심스럽게 다녀왔다고 인사를 하자 경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야기 좀 할까, 가온아?”
딱딱한 아빠의 모습에 얼어붙어버린 유미가 난감하다는 듯 웃으며 자리를 피했다. 그런 엄마를 눈으로 쫓던 가온이 아빠의 얼어붙은 얼굴에 쭈뼛거리며 소파에 앉았다.
“가온아. 아빠가 조금 충격적인 이야기를 해도 끝까지 들어줄래?”
“으응…….”
“이 세상은 세 개가 있어. 그리고 하나라고 알고 있는 달은 실은 하나에서 쪼개진 세 개야. 하나는 약동하는 생명을 담은 노란색 달, 또 하나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상징하는 붉은색 달, 마지막 하나는 끝없는 상상을 상징하는 푸른색 달이지.”
조곤조곤 설명을 이어가는 아빠의 음성에 가온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달의 보석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있어. 원해 달이 하나였을 때, 달이 셋으로 나눠지면서 부서진 조각들이야. 그것은 어떤 달의 아래에 있었느냐에 따라 다른 색을 가져. 그건 보물이야. 정말 귀중한 보물이지.”
“달은 왜 나눠 진건데? 하나였다며.”
가온의 물음에 눈을 깜박이던 경현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원래 신은 둘이었어. 질서를 관장하는 신과 혼돈을 관장하는 신이었지. 그들이 존재함으로서 많은 것들이 생겨났어. 낮과 밤, 대지와 물, 우주와 행성들. 그건 그들이 어찌 한 것이 아니야. 그들은 그저 존재했고,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나타나고 자리를 잡았지. 그들의 존재는 정말 중요했어. 그런데 어느 날, 질서를 관장하는 신이 사라졌어. 온 우주는 혼돈에 빠져버렸지. 서로의 힘을 억누르던 존재가 사라진 거야. 폭주하는 혼돈은 괴상한 생명체를 낳았어. 어둡고 음습하며 제대로 된 피도 심장도 지니고 있지 않았어. 그것은 생명체의 육제를 빼앗아가며 진화에 진화를 거듭했어. 모든 생명체가 이상한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지. 많은 이들이 그것에 전염되었고 곧 전쟁이 일어났어. 스스로를 지키려는 전쟁이었지. 누가 옳은지는 아무도 몰라. 그들은 끝없이 증식했고 생명체들은 그들을 막는데 급급했어. 그리고 문제가 생겼지. 혼돈의 신마저 사라진 거야. 모두 공포에 떨었어. 아비규환이었거든. 그런데, 달이 움직였어. 처음 발견한 게 누군지는 몰라. 아, 달은 두 신이 유일하게 ‘직접’만든 거야. 그리고 마지막 신성을 가진 달은 자신을 셋으로 나눴어. 가장 확실한 육체를 가진 인간과 동물들은 노란색 달이,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은 불완전한 육체를 가진 것들은 붉은색 달이, 가장 허망하면서도 나약한 육체를 지닌 이들은 푸른색 달이 자신의 권역 속으로 데려갔지. 달들은 그들을 권역 속으로 데려가면서 저마다 대륙을 조금씩 떼서 가져갔어.”
“그럼 끝난 거 아냐?”
딸의 질문에 머리를 쓰다듬어준 경현이 말을 이어나갔다.
“괴상한 생명체, 후에 모두가 ‘어둠’이라고 칭하는 것은 어떤 달의 권역 속에도 들지 못했어. 그것들은 끝없이 세상을 원해. 그들은 땅이 없으니까. 하지만 ‘자신만의 육체를 지니지 못한’그들을 달은 인정하지 않았어. 그리고 모든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했어. 예전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했지. 불시에 달이 갑자기 하나로 합해지는 그 순간까지는. 이를 갈며 세상을 탐하던 어둠들은 빠르게 세상들의 틈에서 쏟아져 나왔어.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던 생명체들은 제대로 반격할 수 없었어. 이때 모두들 이쁜 보석이라고 생각했던 달의 보석을 모아서 검을 제련한 장인이 어둠을 베었어. 어떤 무기로도 베어지지 않던 것들이. 모든 장인들은 달의 보석에 달라붙었어. 신체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은 그들이 만든 무기를 들고 대항했지. 노래를 아주 잘하던 어떤 사람이 달의 보석을 쥔 채로 ‘상처가 낫기를, 그리고 저것들이 사라지기를 기원’하며 노래를 불렀을 때, 상처입어 나약해진 어둠이 정화되고 상처 입은 생명체들의 상처가 치유되었어. 달의 보석으로 장식한 펜을 들고 그림을 그리면서 기원했어. ‘저것들이 들어오지 못할 결계를 만들 수 있기를, 저것들이 찢어놓은 세계의 경계를 고칠 수 있기를’ 그리고 이루어졌지. 모든 것이. 그렇게 우리는 희망을 얻었어. 그리고 달이 다시 쪼개지던 순간을 목격한 이들은 맹세했지. 이 힘을 계승하자. 그렇게 세상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어.”
“재미있는 이야기네. 그런데 이 이야기 하려고 그런 거야?”
사실이라고 믿지 않는 딸을 보며 경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온아, 이것 좀 볼래?”
그때 유미가 죽어가는 식물이 담긴 화분을 들고 방으로 들어섰다.
“어…그거.”
“어느새 길어진 그림자를 따라서, 땅거미 진 어둠속을 그대와 걷고 있네요. 손을 마주 잡고 그 언제까지라도, 함께 있는 것만으로 눈물이 나는 걸요.”6)
유미가 노래하자 은은한 노란 빛이 식물을 감싸 안았다. 아주 천천히 식물은 생기를 되찾았다. 그것은 경이였다. 가온은 넋을 놓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것을 보면서 경현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인간은 한 가지 기관을 만들어. 이름 없는 기관. 그곳에 소속된 모든 이들은 세계의 경계를 찢고 나타나는 어둠을 사냥해. 그들은 둘로 나누어지지. 헌터와 프레이어. 그리고 헌터는 다시 둘로 나누어져. 검을 들고 싸우는 소더, 총을 들고 싸우는 거너.”
“프레이어도 둘로 나누어진단다. 엄마처럼 노래를 매개로 치유와 정
화를 노래하는 싱어, 그림을 매개로 결계를 만들고 찢어진 경계를 복구하는 드로어. 엄마는 싱어고, 아빠는 거너란다.”
유미가 심호흡하면서 가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빠는 조금 특이한 체질이야. ‘카인’.”
경현의 부름에 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저건?!”
-여, 또 보네.
“아침에 봤지? 이 녀석은 카인. 바람이 뭉쳐져서 형체를 이룬 녀석이야. 소설 같은 데선 정령이라고도 부르지. 아빠는 이런 자연에서 비롯된 것을 보고 대화하는 시커이기도 해. 시커는 아주 드물게 헌터가 혈통으로 타고나는 재능이야. 그리고 가온이는 아빠를 닮았더라.”
경현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모든 시커는 이름 없는 기관에 소속되어서 헌터가 되어야해. 생존율은 극히 희박해. 헌터의 절반 이상은 헌터가 된 첫 해에 죽어. 아빠는 그래서 가온이가 약했을 때, 안심했어. 약하니까 헌터가 될 수 없을 거라고. 그런데…….”
-지금 넌 충분히 건강하지. 이름 없는 기관은 시커를 찾아. 시커는 모든 자연과 소통해. 더 빠르고 정확하게 어둠을 찾아내지. 그 무엇보다 정확해. 끝없이 침입하는 어둠을 막는데 시커는 귀중하고 또 귀중하다. 현재 존재하는 시커는 단 네 명이야. 경현, 너, 그리고 다른 둘. 하나는 헌터들의 우두머리고 다른 하나는 지금 심각하게 다쳐서 병원에 있지. 언제 깨어날지 몰라. 둘이서 온 세상을 커버하는 데는 분명히 한계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름 없는 기관은 너의 존재를 눈치 챘지. 너에게 선택권은 없….
“있어. 가온아. 저가 원한다면 엄마와 아빠는 너를 보호 할 거란다. 엄마는 프레이어의 2인자였어. 지금도 나의 이름은 건전하단다.”
유미가 무릎을 굽혀 가온의 얼굴을 매만졌다.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엄마는 막기 위해 온 힘을 다할 거야. 엄마는 우리 딸에게 미래를 선택할 권리가 있고 그것은 누구도 침해 할 수 없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가온아.”
“신중하게 생각해라. 아빠도 엄마도 힘이 없는 게 아니야. 우리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주고 싶구나.”
7.
방안은 적막만이 감돌았다. 본래의 지식을 벗어난 사실을 알게 된 이들이 다 그렇듯 가온도 혼란스러웠다. 그녀가 19년이라는 시간동안 배우고 진실로 알아온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 가온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이었다. 부모님이 거짓을 말할 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변치 않는 것이었다. 언제나 따뜻하게 밤을 보내도록 도와주던 침대 속에서 가온은 외로움을 느꼈다.
-너무하다고 생각하나?
갑자기 들여오는 말에 가온은 이불속으로 몸을 웅크렸다.
-진실을 숨긴 그들이 미워? 저주스럽나?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그럴 리가 없잖아!"
가온은 이불을 거칠게 걷어냈다. 부모님이 밉냐고, 설마. 절대 아니었다. 심지어 이해까지 되었다. 그 누가 자식을 사지로 내몰고 싶어 할까. 이해가 되지만 가온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왜 숨겨? 그냥 말해줘도 되잖아!"
-듣는 순간부터 너한텐 선택권은 없어. 듣는 순간 너는 이름 없는 기관에 노출되는 거야. 너는 어째서 이 세상의 평화가 아슬아슬하게나마 유지되는 줄 아나? 온전한 미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세상은 유지되는 거야. 그런데 그들의 과학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이 평화가 유지될 수 있을까? 어떻게 생각해?
"그…그건……."
-너도 알고 있어. 그렇지? 순식간에 무너질 거야. 아비규환이 벌어질 테지. 그리고 어떻게 될까? 이 사실을 알면서도 은폐한 이름 없는 기관은 민중의 심판대네 오를 거야. 그리고 그 곳에서 중요한 위치를 지닌 너희 부모님은 무사할까?
가온은 잔인한 카인의 말을 들으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가온은 인정하기 싫었던 것이 현실로 다가오자 눈을 질끈 감았다.
-알아야 돼. 외면하지 말라고. 너는 충분한 지식을 알고 있잖아? 그리고 말이야. 둘은 엄청 쉽게 말했지만……. 이름 없는 기관에서 벗어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야. 그렇게 쉬운 일이었다면 어째서 그 내용이 외부로 알려지지 않았을까?
‘나는 파티시에가 되고 싶은데 부모님은 안된다라고만하셔. 우리 부모님처럼 맛있는 스위츠를 만들고 싶다구.’
‘난 미술이 좋아. 근데 이거 정말 쉽지가 않아.’
‘난 입양아래. 그런데 말이야, 난 그 사실을 엄청 쉽게 납득했는데 부모님이 전전긍긍 하시더라고. 엄청 미안했어.’
‘엄마가 많이 아프대. 수술해야한다는데, 나한테는 아무도 말 안했어.
내가 공부에 집중 못할까봐 말을 안 했대…….’
가온의 머릿속은 친구들이 털어놓은 고민들로 엉망진창이었다. 비슷한 고민들, 하지만 가온은 언제나 이해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언제나 그녀를 존중했고 그녀가 하고자 하는 것을 무작정 반대하지도 그녀에게 무언가를 숨기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 가온은 거대한 비밀을 듣고 그것을 받아들여야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존재가 해준 말이 계속 꺼끌꺼끌 하게 입안에 남았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부모님은 쉬운 일이라고 했을까. 끝없이 질문하고 질문했다. 그리고 가온의 머릿속에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엄마의 다리에 난 엉망진창의 흉터.
‘엄마 이게 뭐야?’
‘음~ 우리 가온이를 엄마가 지키려고 한 증거야. 왜, 보기 싫어?’
‘우움, 그럼 이건 가온이 탓이야?’
‘아니야. 이건 누구의 탓도 아니란다. 이건 엄마가 가온이를 무사히 지켜냈다는 표시야. 가온아, 엄마는 늘 가온이 편이야.’
‘가온이도 엄마편이야!’
‘정말?’
‘응!!!’
가온의 뺨으로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지키고 싶은 거였다. 부모님은 언제나 지키고자 하셨다. 언젠가 사고가 났을 때도 엄마와 아빠는 가온을 감싸 안았었다. 그들의 안전과는 별개로. 그들에게는 가온의 안전이 더 중요한 거였다.
거실에서 경현은 자책하고 있었다.
“좀 더 있다가 알려줘도 되지 않았을까?”
“결국은 알게 될 일이었잖아요. 가온이는 훌륭하게 견뎌낼 거예요.”
경현은 가온을 지키고 싶었다. 가온의 존재도 모른 채 전장에 나서서 하마터면 유미도, 가온도 잃을 뻔 했기에 경현은 언제나 가온이 약한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렸다. 유미가 조심스레 경현을 끌어안으면서 속삭였다.
“늘 말하지만 가온이가 어릴 적에 약했던 것은 누구의 탓도 아녜요.
우리는 끝없이 강대한 달의 힘에 노출되고, 그건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죠. 굳이 탓할 존재를 찾으려면 아무런 대책 없이 사라진 신들이예요. 자책하지 말아요, 경현.”
경현이 유미의 품에서 벗어나며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온이한테 말해야겠어. 네가 원한다면 이름 없는 기관에 반항이라도 하겠다고. 가온이를, 그 상냥한 가온이를 전장에 밀어 넣을 수는 없어.”
방문 앞에서 가온은 고민했다. 솔직히 모두 믿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정확한건 부모님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을 것이라는 것, 그뿐이었다. 가온, 자신이 ‘싫다’라고 하면 부모님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을 벗어나게 해 줄 것이었다. 과거 사고가난 차안에서 자신만을 보호했듯, 자신들의 안전은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가온은 입술을 깨물곤 방문을 열었다. 계단으로 가는 발걸음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조용히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가 1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에 발을 올렸을 때,
아빠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가온이한테 말해야겠어. 네가 원한다면 이름 없는 기관에 반항이라도 하겠다고. 가온이를, 그 상냥한 가온이를 전장에 밀어넣을 수는 없어.”
다정하고도 상냥한 아빠의 말에 가온은 또다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거칠게 옷소매로 눈물을 닦아내곤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섰다.
“가온아!”
“그럴 필요 없어요. 나 할 수 있어. 이겨낼 수 있어. 난 엄마와 아빠의 딸이니까 할 수 있어. 엄마랑 아빠가 지켜줄 거잖아요.”
“가온아…….”
굳게 끌어안는 아빠의 품에서 가온은 다짐했다.
‘이번에는 내가 지켜줄께요. 둘 다 내가 지킬 거야.’
가만히 지켜보던 유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보고 있죠, 카인? 가온이는 약해요. 아마 살아남기 힘들지도 몰라요. 하지만 말이죠. 저는 장담해요. 마지막 순간에 가온은 가장 높은 곳에서 모두를 지키고 있을 거예요. 상냥한 아이니까요.”
거실의 구석에서 이들을 바라보고 있던 카인은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알아. 경현이 저 녀석도 그랬거든. 안 들리겠지만. 미래를 노래하는 치유사, 정 유미.
먼 훗날, 전장의 한 가운데에서 자연의 사랑을 온몸에 휘감고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승리의 여신, 한 가온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절대로 아빠만큼 강해 질 수 없을 거야. 장담 할 수 있어.”
마스터 헌터이자, 제로 헌터로. 온전한 육신으로 전장을 떠난 한 가온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 되었다. 그 누구보다 상냥해서 그 어떤 시대보다 높은 헌터들의 생존율을 기록하는 시대의 지도자는 가족의 사랑과 배려에서 태어났다.
1) 싱어(Singer) : 보조 직종인 프레이어(Prayer)의 한 갈래. 목소리를 매개로 치유와 정화를 할 수 있다. 매개가 되는 것은 사람에 따라 기도, 노래, 속삭어. 솔직히 이건 너무 위험하잖아. 세상을 탐하는 것들을 사냥하는 거
2)시커(Seeker) : 보는 자. 헌터들 중 일부가 드물게 가지는 재능. 리스너라고 불리기도 한다. 자연에 속한 것들을 보고 들으며 교감하는 자들.
3)헌터(Hunter) : 전투 직종. 총 혹은 검등의 냉병기를 이용하여 어둠을 격살하는 존재들을 말한다.
4)프레이어(preyer) :보조 직종. 헌터들을 보조하여 치유, 정화, 결계 복구, 보호막 전개등을 전담하는 존재들을 말한다.
5) 제로 헌터(Zero Hunter) : 생존율이 20%이하인 헌터와 프레이어들 중에서
6) 박효신, 눈의 꽃 中
3. [Ce trois Lune _ 그 세상의 종말] 마지막 이야기
부드럽게 내려앉은 손 안에 잠든 아이야, 홀로 어디를 가느냐
검은 바람이 세상을 휩쓸었다. 고통어린 눈물이 길가에 멈추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프다는 고통어린 절규가 소리를 잃었을 때, 그곳에는 빛이 내리었다.
전해오는 옛 이야기를 믿으며 검을 움켜쥐었다. 굳게 쥔 손에 피 섞인 땀 한 방울이 타고 내렸다. 죽음을 향해 행군하는 자들. 갈 곳 없는 이들의 집합. 잔악한 그림자에 혈육을, 연인을, 미래를 빼앗긴 살아있는 시체들.
당신을 지키겠다는 각오, 처절하게 당신을 사랑한다는 마음, 꿈을 가지고 있다는 희망, 아직 꿈을 품고 있다는 마음, 당신을 지키겠다는 각오,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는 소망, 너를 증오한다는 살의, 너도 그리고 나 자신 조차도 증오하기에 스스로가 두렵다는 마음, 나를 증오하기에 당신을 지키겠다는 각오.
나는 당신에게 빛을 걸었다. 그리고 당신은 내게 생명을 걸었다. 길의 끝에 선 자들의 마지막 발버둥은 너무도 미약하여 손짓 한 번에 죽어 나자빠지는 생명에 지나지 않았다. 검 날을 따라 보랏빛 가루가 흘러 내렸다. 피를 토하며 쓰러지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어머니. 질끈 감은 두 눈에, 자식들을 모두 살려내겠다는 일념으로 생명을 토해 실을 잣던 이가 선명하게 맺혔다. 어미의 살과 뼈로 만들어진 계단을 밟고, 어둠과 마주치는 마지막 골목까지 왔다.
금빛용의 화신이여, 우리를 감싸 안아라. 고통만이 남은 땅에 수십의 시체가 가지런히 놓였다. 아아, 친애하는 이들이여, 너희들의 죽음을 뒤에 두고 우리는 가리라. 우리는 죽음을 향해 행군하는 시체들. 인간을 위한다는, 인간을 지키겠다는 허울 좋은 미명 아래 몸을 던지는, 미래를 잃은 자들.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증오, 그리고 죽어버린 형제들이 우리의 등을 떠미는 힘. 우리는 간다.
그 끝에 죽음만이 온전히 이를 드러내고 있더라도. 우리는 죽음 없이는 걸을 수 없는 자들.
검날 위로 노란 달빛의 광희가 어리었다.
잔혹한 신이여, 그대에게 경배를.
죽어나자빠진 형제들이여, 그들의 죽음에 모욕을.
죽음을 향해 행군하는 우리들이여.
걸어가는 길에 피와 고통, 그리고 서글픔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