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ttle garden

* 오이스가 엔솔로지 <우주를 건너>수록작


내 눈에 비치는 세상은 지극히도 평범하다. 내 눈에 비치는 모든 것들은 지독하게도 일상적이다. 나는 그 속에서 지독한 권태를 느낀다. 변하지 않는 세상. 변함이 없는 세상. 그저 흘러갈 뿐인 세상.

 

세상의 흘러가는 모든 것들은 시간의 손에서 시작되어 신의 손을 잡고 혹은 홀로 일어서서 걸어간다. 때로는 뛰기도 하고 때로는 걸으면서. 때로는 멈추고 때로는 엇나가면서, 그렇게.

 

그래서 너무 외로웠다.

 

 

 

내가 신의 손을 잡은 것은 그날, 세상의 모든 것들이 붉게 물들고 신들이 그 발을 멈춘 날. 기억이 일그러지고 어둠속에 집어삼켜진 날, 그리고. 흐름 속에서 완벽하게 잘려나간 날. 나는 그 멈춰버린 흐름 속에서 눈을 감은 신의 손을 잡았다.

 

유리되어버린 그 잿빛의 멈춰버린 세상에서 애타이 도와줄 존재를 찾아 손을 뻗은 나. 그리고 망설임 없이 나의 손을 잡은 존재의 이름은 이면(裏面)’. 신은 눈을 감은 채로 나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었다. 얼굴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그 얼굴은 그렇게 웃으며 사라졌고 세상은 흐름을 되찾았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외로웠던 시간. 홀로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나, 스가와라 코우시. 나는 역사상 최초의 이면의 마법사.

 

 

 

깜박이는 두 눈 사이로 빛이 다가왔다. 스가와라는 몇 번 눈을 깜박이다 몸을 일으켰다. 반짝거리며 부서지고 있는 태양의 조각들이 버석거리며 눈에 밟혔다.

따가워.’

아직 잠이 물러가지 않은 눈은 그 조각들이 버거웠다.

.”

길게 내쉬는 호흡에 기적이 담겼다. 투명하게 빛나며 태양빛을 양껏 들여보내고 있던 유리창이 순식간에 새까맣게 물들었다. 근원을 잃은 빛들이 빠르게 사그라졌다. 천천히 침대 밖으로 나서기 위해 움직이는 스가와라의 몸에 얽힌 이불이 바스락거리며 그를 붙잡았다.

자아아침이니까.”

그의 말이 허공에 떨어져 파문이 일었다. , 하는 경쾌한 울음으로 시작된 파문은 순식간에 스가와라를 스쳐지나 사라졌다.

, 좋아.”

방금 막 잠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말끔한 모양새를 거울로 확인한 스가와라가 손뼉을 짝, 하고 치자 새까맣게 물들었던 유리창이 다시 투명하게 변해 밖에 서성이던 태양의 조각들을 방안으로 집어던졌다.

 

흥흥~.”

즐거운 멜로디의 콧노래를 부르며 스가와라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의 손이 움직이는 것에 따라 방안의 모든 것들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어지러운 침대는 말끔해졌고 밤새 닫혀있어 탁해졌던 공기는 어느새 활짝 열린 창문 덕에 맑아지고 있었다.

삐익-.”

어느 정도 방안이 정리되었을 즈음, 열린 창틀에 새한마리가 내려앉았다. 스가와라는 새의 목에 달린 천 조각에 선명하게 새겨진 문양을 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에에? 이쪽은 광명쪽 단골일 텐데.”

한쪽만 확연히 커진 눈으로 의아함을 드러내던 스가와라는 이내 고민하는 것을 멈추고 새의 조그만 머리위로 손가락을 얹었다. 약속된 동작은 새의 조그만 몸속에 잠든 마법을 일깨웠다. 그것은 아름답게 풀려나와 사방을 금빛으로 물들였다.

 

삐이-.”

새의 새까맣던 눈이 금색으로 물들었다. 확연한 광명의 기운에 스가와라는 덩치를 불려가는 의아스러움을 애써 가슴 속으로 밀어 넣었다.

고매하신 이면의 마법사께 서쪽의 귀족이 허락을 구합니다.”

새의 부리에서 흘러나오는 정중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목소리에 스가와라는 작게 신음했다. ‘광명의 마법사와는 그리 친한 편은 아니지만 그의 고객을 빼앗는 것은 그의 양심에 찔리는 일이었다. 동종업계에 종사하는 사람 간에 지켜야하는 최소한의 예의라는 것이 있는 법이 아니겠는가. 스가와라의 머릿속 따위는 조금도 모를 새는 계속해서 그 안에 담긴 메시지를 뱉어냈다.

서쪽의 미래를 짊어질 아이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광명의 마법사께 지혜를 청하였으나 광명의 마법사께서 이면을 찾아가라.’고 하시어 무례하게도 전령을 통해 연락드립니다. 부디 이면의 마법사께서 너른 아량으로 깊은 지혜를 베풀어주시길 청합니다.”

순식간에 검게 돌아온 새의 눈에 스가와라가 손을 떼었다. 답을 기다리며 그를 빤히 보는 새에 스가와라는 작게 웃으며 침대 옆의 작은 서랍에서 조그만 상자를 꺼냈다.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진 상자를 연 스가와라는 그 안에서 조그만 쿠키 하나를 꺼내서 부순 후에 새의 앞에 뿌려주었다.

어쩔까.”

고개를 갸웃거리던 새가 콕콕 쿠키를 쪼아 먹는 것을 멍하니 보는 스가와라의 생각이 빠르게 흘렀다.

 

 

 

으아아아! 아파, 이와쨩!”

그냥 뒈져!”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을 지닌 남자를 어디선가 나타난 새까만 머리의 남자가 있는 힘껏 걷어 찼다.

아악! , 나 귀족이란 말이야!”

귀족 상해죄로 잡혀가면 그만이지, 짜샤!”

엄격한 북쪽이라면 내뱉는 것만으로도 사형에 처해질 죄를 내뱉은 검은 머리의 남자가 쓰러진 갈색 머리를 가진 남자를 후려쳤다.

이와쨩! 내가 잘못했어! 이와쨩!”

애타는 외침을 가볍게 넘긴 남자가 기어코 다시 한 번 그를 걷어찼다.

너 진짜 왜 사냐?!”

 

엄청난 소란에 지나가던 가신들이 발을 멈추고 그들을 보았다.

허허, 저 검은 머리의 소년이 이와이즈미공의 장자던가요.”

맞습니다. 소공자와 함께 있군요.”

신분을 뛰어넘어 친교를 나눌 수 있는 이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지요.”

백발이 성성한 이들은 급한 일도 잠시 미뤄두고 허허롭게 한담을 나누었다.

그나저나 그것은 여전한 걸까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대공자께서 미래를 짊어지지 않겠다고 하시었으니 소공자께서 미래를 이어나가셔야 할 터인데.”

대공께서 다 계획이 있으시겠지요. 요 근래 성에 광명의 흔적이 자주 드나든다 하더이다.”

흐음. 조속히 해결되어야 할 터인데 말입니다.”

다 잘 되지 않겠습니까.”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들은 여전히 투닥거리고 있는 두 사람을 보다 몸을 돌렸다.

자아, 일이나 하러 가십시다.”

그러시지요. 이게 예산이.”

 

그래서 무슨 생각이냐, 이 화상아?”

아니이솔직히 가기 싫은걸? ‘이면의 마법사라면 분명히 중앙 쪽이잖아! 그쪽엔 우시와카쨩이 있다구!”

가기 싫어! 퉁퉁 부풀어 오른 뺨에 입술까지 삐죽대는 꼴에 이와이즈미가 다시 주먹을 들어 그의 머리를 후려쳤다.

! 이와쨩, 기사가 오이카와씨를 때리면 오이카와씨는 죽어요! 이와쨩의 힘이 얼마나 좋은지 알아?!”

그냥 아주 죽어라, 제발!”

이와이즈미가 결국 그를 걷어찼다. 두 사람은 다시 길고 긴 추격전을 시작했다.

 

 

 

세상에는 열일곱의 신이 존재한다. 시간, 북풍, 광명, , 중도, 전쟁, , 대지, 대기, 미풍, , , 죽음, 광물, 초목 그리고 이면. 미풍의 신이 쌍둥이라는 것만 빼면 모두 단 한명이었다. 그들은 역사의 첫 페이지를 열었고 그곳에 직접흔적을 남겼다. 그 이후 그들은 단 한 번도 직접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신들은 그저 존재할 뿐 그들을 찬양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찬양을 받기에는 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너무도 적었다. 그들은 몇몇 인간들의 손을 잡아주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손을 잡은 인간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힘은 그들이 가진 힘의 십분의 일도 채 안되었다. 더 많은 인간의 손을 잡을수록 한명 한명에게 줄 수 있는 힘은 더 작아졌다. 인간 세상에 드러낼 수 있도록 허락된 그 십분의 일에서 또 잘게 나누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들의 취향과 사상에 따라 조금이라도 더 많은 손을 잡기 위해 애썼다. 조금이라도 인간들이 편히 살아가도록 돕기 위하여.

 

그렇게 신들은 인간의 손을 잡았고 그들은 인간에게 힘을 주었다. 신의 손을 잡은 그들은 깊은 지식과 너른 지혜를 가지고 인간을 도왔다. 그것은 기적이었으며, 이성의 너머에 있는 힘이었다. 그들은 평범했으나 평범하지 않은 인간이었으며 동시에 신이 존재하는 완전한 증거였다. 신의 손을 잡지 못한 인간들은 그들을 마법사라고 칭하기 시작했다.

 

마법사의 수는 언제나 달랐다. 그들은 보통의 인간들 보다 오래 살기도 했고 때로는 보통의 인간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일찍 죽기도 했다. 어떤 신은 단 한명의 인간의 손만을 잡았으나 어떤 신은 수십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단 한명의 손도 잡지 않기도 했다. 그래서 매일 그 수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가장 많은 마법사는 광명의 신이 손을 잡은 마법사였다. 그들은 동시대에 최소 수명에서 많게는 수십 명에 달했다. 밤의 신은 오직 한명의 손만을 잡았다. 미풍의 여신들은 쌍둥이여서 그들도 항상 쌍둥이의 손만을 잡았다. 역사를 넘겨보면 모든 신들이 최소 한명의 손을 잡았다는 기록이 있었다.

 

단 하나의 신, 이면의 신만을 제외하고.

 

 

 

허억, 허억. 이와쨩 너무 끈질겨!”

, 허억. 그냥 좀 맞으라고!”

이와쨩의 그 짐승 같은 주먹에 맞으면 오이카와씨는 섬세해서 죽는다구!”

오이카와가()의 성에서 가장 큰 정원을 몇 바퀴나 돈 두 사람은 숨이 끊어질 것처럼 헉헉거리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이 자식이!”

오이카와의 말에 발끈한 이와이즈미가 다시 달려들려고 자세를 잡는 순간 두 사람의 사이에 황금빛을 두른 빛 덩어리가 떨어졌다.

?”

! ‘광명의 마법사!”

빛 덩어리가 위협적으로 반짝이자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는 서둘러 눈을 가리며 등을 돌렸다. , 하는 귀엽기 짝이 없는 소리와 눈을 감고 등을 돌린 채 눈을 가렸음에도 눈이 따가울 정도의 빛이 터져 나왔다.

진짜 악취미!”

동감.”

두 사람은 저릿한 눈을 비비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처음 겪는 사람이라면 몰랐겠지만 그들은 벌써 몇 번이고 이런 상황을 겪은 바가 있었다. 이건 호출이었다. 그것도 아주 정중한 수준의.

비명은 안 질러서 다행이다.”

티나게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하는 오이카와에 이와이즈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뒷목을 잡아챘다. 오이카와의 유모라거나 그의 시종이 본다면 기겁하겠지만 이런 식으로 호출당한 이상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가는 더 끔찍한 호출을 받게 되리라. 이와이즈미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발을 재촉했다.

 

서쪽의 귀족이자 아주 먼 역사의 페이지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그 이름을 새긴 유서 깊은 가문의 수장은 눈앞에 앉은 이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고스란히 받고 있는 남자는 금빛의 로브를 뒤집어써서 입만이 겨우 보일 뿐이었다.

긴장 되나?”

황제를 제외하고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되는 귀족에게 내뱉는 말 치고는 아주 무례한 말이었으나 그 말을 듣는 당사자도, 그리고 내뱉은 사람도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조금긴장되는 군요.”

괜찮을 거야. ‘이면은 단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예의를 차리는 성격이라고 들었으니까.”

마법사는 방긋 웃으며 그가 보낸 새와 함께 날아온 새까만 새를 바라보았다.

“‘흉조를 부리는데 말입니까.”

아하하, 그는 이면이니까 말이지. 그에게 법칙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그는 말 그대로 이면(裏面). 모든 것의 뒤를 넘겨다보고 내부를 들여다보는 사람인걸. 겉으로 드러난 것이나 사람들의 말은 아무런 가치가 없어.”

그가 킬킬거리며 까마귀의 머리 위로 손가락을 얹었다. 광명을 담은 손가락이 그 머리에 닿는 순간 깊이 잠들어있던 마법이 깨어났다.

 

살아있던 새의 심장이 순식간에 멈췄다. 살아있는 날짐승의 깃털이라는 것을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생기 넘치던 검은 깃털이 부드러운, 그러나 인간의 손을 탄 무언가와 같이 변했다. 살아 숨 쉬던 새가 순식간에 나무 조각으로 만든 인형이 되었다. 수장이 그 기괴한 모습에 헛숨을 들이키자 마법사가 낄낄대며 웃었다.

그것 봐. 그와 관계된 것을 액면가 그대로 믿으면 아주 많이 곤란하다고!”

어딘가 환희에 찬 목소리를 한때는 까마귀였던 새 인형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짓밟았다.

“‘서쪽으로부터 온 청은 잘 받았습니다. 제가 무슨 도움이 될지 모르나 도움이 필요한 자를 돕는 것은 마법사의 의무. ‘이면의 손을 잡은 나는 그 청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허나 저의 거처는 아주 작아 귀족의 사절이 머물기 마땅치 않습니다. 하여 서쪽의 미래를 짊어질 이만을 초대하고자 합니다. 그곳에 간 나의 아이를 손에 든다면 나에게로 오는 문이 열릴 것입니다.”

새 인형의 부리가 탈칵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것을 확인한 마법사가 손을 떼자 새 인형의 주면으로 검은 오라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 이런 식의 초대는 굉장히 신선한데?”

으음.”

, 어쩔 거야? 그는 거처에서 나오지 않을 거야. 그리고 초대하지 않은 이들을 들이지도 않겠지.”

혹시.”

“‘이면의 거처를 물어보려는 거라면 나는 몰라. 그는 홀로 존재한다고. 우리나 다른 마법사들이야 같은 신의 손을 잡고 있다 보니 어찌어찌 서로의 위치를 느끼지만 그는 혼자야. 무리라고. 그가 초대하지 않는 이상 그의 위치를 알 방법은 없어.”

그럼 새는 어떻게 보냈던 겁니아니, 어리석은 질문이었군요.”

마법사가 느긋하게 의자에 등을 기댔다.

걱정하지 마. 그는 역사상 가장 강한 마법사 중 하나라고. 그의 거처에서 후계자에게 해를 입힐 간 큰 녀석은 없을 거야.”

 

 

 

스가와라는 집안을 둘러보았다. 조그만 마을에 흔히 있는 조그만 2층 집은 고요했다. 태양빛 부스러기들을 두르고 반짝이며 내려앉는 먼지와 활짝 열린 창으로 고개를 내미는 바람의 조각들, 그리고 온 집안을 활보하는 빛 조각들까지. 그는 손을 까딱여 옷장에 가지런히 걸려있던 로브 하나를 불러냈다. 자연스럽게 그의 몸을 감싸는 로브의 끝자락을 가볍게 정리하며 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곧 손님이 올 테니 호스트로서 객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했다.

 

어머, 마법사님!”

. 안녕하세요, 리사.”

부드러운 미소에 조그만 산골 마을 엘리사의 빵집주인 리사가 뺨을 붉혔다. 언젠가 마을에 나타난 이 젊은 마법사는 항상 정중하고 예의발랐다. 이따금 마을에 들리곤 하는 상인들의 이야기 속 콧대 높은 마법사들과는 달랐다.

빵이라면 어제 사가지 않으셨나요?”

그녀가 밀가루 묻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카운터에서 나오자 스가와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이 올 예정이거든요. 조금 더 사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

그의 말에 리사의 얼굴이 조금 어색하게 굳었다. 그녀는 스가와라가 마을에 거처를 만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에 나타난 귀족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지역 그 자체를 칭호로 사용할 수 있는 귀족들 말고도 작위와 영토가 있는 귀족들은 많았고 그들은 역사상 최초의 마법사라는 그를 탐냈다. 마을에 온 그들은 마을 사람들을 인간취급하지 않았다. 버러지 취급하며 마을에서 분탕질을 쳤었다. 조금이라도 예쁘장하다면 나이를, 결혼여부를 막론하고 취하려고 하는가 하면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여관 주인을 죽이려하기도 했었다.

기억을 더듬던 그녀가 파르르 떨자 스가와라가 작게 웃었다.

괜찮을 거예요.”

그녀는 굳건한 그의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면 그 모든 일을 처리했듯 잘 대처해주리라. 그녀는 콧김을 훅 뿜어내더니 후다닥 오븐이 있는 주방 쪽으로 얼굴을 밀어 넣었다.

여보! 그제 들여온 고운 밀가루로 빵 좀 구워욧!”

?! 그건 마법사님 댁에 보낼 쿠키 만들 재료란 말이야! 얼마 전에 우리 리즈 약 만들어주신 답례로 내가 조금 겨우 주문한 거란 말이야!”

마법사님이 손님을 치르신다니까 군말하지 말고 어서 만들어욧!”

뭐야?! 그런 거라면 먼저 말했어야지! 어디보자, 빵을 만들 재료는 필요 없고, 과자나 좀 만들어 드려야겠구먼. 리즈! 리즈! 창고에 가서 살구잼 좀 가져다주려무나!”

하하.”

온 가게를 울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스가와라가 작게 웃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항상 친절했다.

지금부터 시작하면 아무리 늦어도 내일 아침엔 댁에 가져다드릴 수 있을 거예요. 손님은 얼마나 오실 예정이에요?”

한명이요. 너무 많이 오면 소란스럽잖아요.”

스가와라의 말에 그녀가 감동한 듯 앞치마를 꽉 잡았다가 놓았다.

매일 아침 리즈를 시켜서 빵을 가져다 드릴게요.”

, 그럴 필요는.”

우리 남편이 저래보여도 도시에서 꽤나 잘나가는 빵집에서 공부한 사람이라구요. 우리 마법사님이 드시는 음식 깔보지 못하게 해주겠어!”

이전에 왔던 귀족들이 했던 말이 퍽이나 마음에 안 들었었나보네.’

이글이글 타오르는 그녀의 눈에 스가와라가 뺨을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할게요, 리사.”

얼마든지요!”

용건을 마친 스가와라가 빵집을 나서자마자 뒤에서 빵집 주인 부부와 그 딸의 의욕 가득한 목소리가 그의 옷자락을 붙잡기 위해 헐레벌떡 뒤따라왔다. 그 소리에 작게 웃은 스가와라는 발을 재촉했다. 들려야할 가게가 많았다.

 

 

 

?”

오이카와는 갑자기 뒤바뀐 광경에 눈을 깜박였다. 방금까지 있었던 절제되어 있지만 화려하던 집무실은 온데간데없고 허름한 오두막 안에 서있었다.

아니, 이걸 허름하다고 할 수 있나?”

오이카와는 눈을 껌벅였다. 귀족들이야 흔하게 사용하는 거라지만 평민의 집에서는 보기 힘들다고 배웠던 유리창이, 심지어 조그만 정원으로 나가는 문까지 설치된 거대한 유리창이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정원은 성에서 보던 것과는 달랐지만 꼼꼼하게 관리 받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깔끔했다. 유리창 옆으로 드러난 벽돌 벽은 추하기는커녕 깔끔하게 관리되어 품격 있어 보이기까지 했다. 공기 중에 떠도는 은은한 풀냄새는 싱그럽기 그지없었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기까지 했다.

대체.”

헛웃음만 짓던 오이카와는 문득 손에 들고 있던 새 인형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인형이 날개를 펴는 것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순간 둥실 떠오른 인형은 날개를 펄럭여 벽 한쪽에 있는 횃대로 가 앉았다. 그 순간 나무인형에 불과하던 인형이 진짜 새로 변했다. 부드럽게 열린 새의 부리가 생기로 반짝였다.

까악.”

.”

그 기이한 모양새에 오이카와가 멍하니 감탄사를 내뱉었다.

진짜 여기 뭐야. 나 마법사의 집에라도 온 건가.”

 

? 벌써 왔네?”

오이카와는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몸을 휙 돌렸다. 있는지도 몰랐던 등 뒤의 문이 열려 있었고 그 곳에 서있는 남자의 연회색의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오이카와의 심장이 작게 고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서쪽의 미래를 짊어진 자맞나?”

남자의 말에 오이카와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로브를 벗었다. 허공에서 그가 로브를 놓자 로브가 스스로 팔락이며 문밖으로 나가 팡팡 소리가 날 정도로 스스로를 털어대더니 부드럽게 문을 닫고 들어섰다. 로브는 오이카와의 시선이 따라오든 말든 옷장의 문을 열고 옷걸이를 꺼내 스스로 걸린 후에 옷장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설마, 마법사?”

.”

아하, 마법사구나. !?”

경악해서 목을 홱 돌린 오이카와를 보며 스가와라는 생각했다.

목 다칠 텐데.’

 

 

 

뭐야, 저렇게 보내도 되는 거야?”

이와이즈미는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날아오는 뭔가를 받아들고 사라져버린 오이카와가 서있던 자리를 멍하니 바라봤다.

, 이게 무슨?”

분명히 혼자 가라고 하면 하지메와 함께 가겠다느니 시끄러웠겠지요.”

그의 말에 이와이즈미는 앞뒤 하나도 모르지만 맞는 말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화들짝 놀라 멈춰 섰다.

그럼 용건 끝났으니까 나는 간다?”

그렇게 하시지요.”

, 배웅은 필요 없어.”

자리에서 일어나 빛나는 태양빛을 한껏 머금은 남자가 가볍게 발을 구르자 금빛 광채와 함께 남자가 사라졌다.

놀랐겠구나, 하지메.”

, 아닙니다.”

그는 본능적으로 날아오는 것을 쳐내려다가 그의 부름에 가까스로 움직임을 멈추던 이와이즈미를 떠올리며 흐뭇한 듯 미소를 지었다.

참 잘 컸어. 우리 토오루도 그랬으면 좋으련만.”

, . 근데 이게 무슨?”

, ‘그것때문이라네.”

“‘그것? 그건 광명의 마법사께서 봐주기로 하신 것 아닙니까?”

으음, 그랬긴 하다만조금 더 정확한 방법이 있다고 하더군.”

미간사이를 꾹꾹 누르는 그를 바라보는 이와이즈미의 눈에 의아함이 맴돌았다.

이면의 마법사가 그쪽으로는 더 탁월하다고 하더군. 그쪽으로 보낸 참이다.”

수행원은요?”

오이카와만 초대를 받았다네. 소문대로 어리석은 놈들 때문에 귀족의 객을 환영하지 않는 분위기더군.”

아아.”

이와이즈미는 언젠가 건너들은 사건을 떠올리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어디를 가나 모자란 놈들이 꼭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법이었다.

 

 

 

, 그러니까 당신이 이면의 마법, ?”

오이카와의 물음에 스가와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달콤한 향이 피어오르는 잔을 그의 앞에 내어주었다.

근데 내가 왜 여기 있는 건데?”

내가 초대했으니까.”

똑같은 잔이지만 싱그러운 향이 흐르는 잔과 접시 하나를 든 스가와라가 오이카와의 맞은편에 앉았다. 스가와라가 두 사람 중간 즈음 내려놓은 접시에는 말린 과일 여러 가지가 소복이 담겨 있었다. 처음 보는 모양새에 잔이고 말린 과일이고 경계하는 오이카와를 무시한 스가와라가 말린 과일 하나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것을 힐끔거리던 오이카와가 말린 과일 하나를 집어 들었다. 콕콕 찔러보던 오이카와가 눈을 꼭 감고 하나를 입에 물고 오물거렸다.

“! 맛있어!”

화악 밝아지는 오이카와의 얼굴에 스가와라는 생각했다.

애 같아.’

 

오이카와는 얼굴위로 쏟아지는 햇살에 눈을 떴다.

평화롭다.’

단순히 잠자리를 따지자면 불편한 곳이었다. 우선 침대부터가 성에서 사용하던 것만큼 푹신하지 않았다. 하지만 공기 중에 떠도는 싱그러운 향과 이불에서 흘러나오는 상쾌한 향이 그를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따뜻한 느낌이네.’

오이카와는 괜히 침대 안에서 부스럭거리다가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지독하고 치가 떨리는, 그것들과 멀어진 기분이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부드러운 회색 머리카락을 지닌 그가 괜찮다고 속삭여주는 것 같았다. 평화 속에서 오이카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저만치 물러갔던 잠이 어느새 그의 곁에 와서 그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다시 잠속으로 빠져 들 무렵 작은 노크소리가 방안으로 스며들어왔다. 잠깐의 침묵 후에 천천히 열린 문 사이로 스가와라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침대에서 흘러나오는 가지런한 숨소리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방안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투명하던 유리가 새까맣게 물들고 숨어들어온 빛들이 모두 바스러진 것을 확인한 그는 천천히 문을 닫았다.

좋은 꿈을 꾸길.”

나지막한 인사를 남기며.

 

 

 

세상에는 하나의 제국과 여러 개의 왕국이 존재했다. 왕국들은 자주 다투고 화해했으며, 생겨나기도 했고 사라지기도 했다. 그 사이에서 제국은 언제나 고고했다. 그들은 전쟁보다는 평화를 사랑했으나 그들의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은 변화를 환영했으며 고여 썩어 들어가는 것을 경계했다. 그 속에서 수많은 귀족들이 역사에 발자국을 남겼고 스러졌다.

 

제국의 황제는 즉위하면 제국의 모든 귀족들 중에서,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가장 강한 자와 가장 현명한 자, 가장 부드러운 자 그리고 가장 올곧은 자를 택해 제국의 사방을 맡겼다. 그리고 그들은 황제의 모든 것에 직언을 해야 했고 그들이 필요한 곳 가장 앞에 서있어야 했다. 그 대가로 그들은 지역 그 자체를 칭호로 사용했다. 그 자리는 귀족들에게 있어서 가장 빛나는 명예였다. 귀족으로 태어나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영예이자 가장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자리. 지역을 칭호로 가진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서쪽의 귀족, 오이카와. 제국의 시작과 맞닿아 있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그들은 가장 부드러운 자라는 칭호를 가진 이가 당대의 수장이었다. 그는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으나 첫째는 성인식을 치르자마자 미래를 짊어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미래는 자연스럽게 둘째 아들의 어깨위로 떨어졌다. 그것은 둘째 아들에게 있어서 날벼락과도 같은 일이었다. 부드러움이라는 가치아래에서 자라난 그는 빛나는 강함을 동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북쪽의 귀족, 우시지마가()의 미래를 짊어진 우시지마 와카토시를 만남으로 인하여 변질되었다.

 

첫 만남은 황실에서 주최하는 토너먼트였다. 그곳의 승리자는 언제나 가장 강한 자의 칭호를 받을 이로 거론되었다. 오이카와는 그것을 동경했다. 성취하고 싶은 목표였다. 순조로워 보였다. 그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하지만 그는 소년부 결승에서 우시지마 와카토시에게 패배했다. 제대로 검을 나누지도 못한 패배는 오이카와를 짓눌렀다. 이후 그들은 사사건건 거의 모든 토너먼트마다 결승전에서 마주쳤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다.

 

오이카와는 우시지마가 가진 재능이 탐났다. 부러웠다. 질투했다. 강인한 몸을 가지기 위해 스스로 몸을 혹사시키기도 했지만 그곳에서 꽃피는 재능은 없었다. 오이카와는 절망했다. 답이 없었다. 그의 친우이며 먼 훗날 그가 수장이 된다면 그의 뒤를 지켜줄 이와이즈미는 그런 그를 이해해주지 못했다. 그는.

 

이와쨩은 내가 토너먼트에 나간다는 것, 그 자체를 이해하지 못 해. 굳이 그걸 나가야 하냐는 거야.”

오이카와는 인상을 쓰며 달큰한 맛이 나는 우유를 홀짝였다. 따끈따끈한 빵과 신선한 과일들이 올라온 식탁은 오이카와에게 있어서 아주 신기한 것이었다. 조리된 것이라곤 빵뿐인 식탁. 항상 화려하게 조리된 음식만 먹어오던 그에게는 아주 독특한 경험이었다.

. 이해를 못하는 건 나도 그런데? ‘서쪽의 오이카와라면 그 부드러움과 그 너머의 카리스마로 유명한 가문이잖아.”

마법사쨩도 똑같은 소리를 하네. 우리 가문의 그걸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나는 그래도 강한 게 좋아.”

흐음.”

스가와라는 새하얀 빵을 입 안 가득 밀어 넣는 오이카와를 빤히 바라보았다.

사실 어른들도 이해 못해. 내가 몹쓸 저주에라도 걸렸다고 생각하겠지. 학문을 갈고 닦을 시간에 나는 검을 휘두르고 있으니까.”

.”

다들 내가 미쳤다지만 나는 포기 못해.”

그렇게 말하는 오이카와의 눈은 저주 같은 것에 걸린 이의 눈이라기엔 너무도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방긋 웃었다.

그래.”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의 긍정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음으로 마주한 긍정은 따뜻한 구석이 있었다. 작게 뛰던 심장이 조금 더 힘차게 뛰기 시작했다.

 

 

 

오이카와는 마을을 걷고 있었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위화감만 줄 거라며 스가와라가 내어준 옷은 어딘가 불편했다. 옷은 부드럽게 몸에 휘감기지 않고 겉돌았다. 피부에 닿는 옷감은 거칠었다. 오이카와는 작게 불평했지만 개의치 않고 마을을 쏘다녔다. 성에서는 쉽게 맛볼 수 없는 진귀한 자유였다.

 

나는 네게 문제가 있다고 들었고 그걸 고쳐달라는 부탁을 받았어.’

부드럽게 열린 스가와라의 입이 속삭인 소리에 오이카와는 발아래가 부서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결국 그는 이해받지 못했노라, 그는 가문에서 부끄럽게 생각하는 이단아라고 손가락질 받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오이카와는 스가와라를 경계했다. 마법사란 곧 기적을 낳는 자. 그가 자신의 마음에 어떤 짓을 할지 아무도 몰랐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정해져 있었다. 그의 가문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광명의 마법사는 주로 빛나는 것과 뭔가를 찾는 것, 그리고 살아가는 육체에 관련된 것에 능숙한 편이었다. 그러나 처음 등장한 마법사인 스가와라는 할 수 있는 것도, 할 수 없는 것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스가와라의 눈을 마주한 오이카와는 그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리라 믿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본 스가와라라는 사람은 그의 마음을 아는 사람 같았다. 어쩌면 그는.

 

얼마나 걸었을까. 오이카와는 발을 멈췄다. 마을의 어린아이들이 뛰어노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평화로움. 그들은 아무런 걱정이 없어 보였다.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

?”

히익?! 마법사쨩! 그렇게 막 뒤에서 나타나면 오이카와씨의 건강에 안 좋아!”

왜 저 아이들이 부러워?”

자유롭잖아. 나처럼 검을 연마한다고 미친 사람 취급을 받지도 않고.”

난 너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

오이카와는 스가와라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부드럽게 웃었다.

외로움은 나도 잘 알아. 특이하다는 것은 나도 잘 알아. 하지만 그게 곧 틀린 건 아닌걸.”

마법사쨩.”

스가와라는 몸을 돌려 오이카와를 마주 보았다.

있잖아. 내가 조금 생각해봤는데, 이해가 안 가서 말이지. 네가 추구하는 강함은 무력이야?”

?”

내가 생각하는 강함은 좀 다르거든.”

스가와라의 눈이 하늘로 향했다.

무슨 말.”

나는 낙오되기 싫어서 마법사가 되었어.”

다시 마주한 스가와라의 눈은 평소의 따뜻함은 단 한조각도 없었다. 텅 비어있는 눈은 으스스했다. 한 줄기의 바람이 오이카와를 감싸 안았다. 어쩌면 그는 이해해줄 사람을 만났을지도 몰랐다. 두근거리던 마음이 천천히 형태를 만들어가던 마음이 이름표를 달았다.

 

 

 

스가와라는 기억했다. 세상이 붉게 물들고 모든 것이 멈춰선 그 날을. 세상이 시간을 따라가지 못하고 유리된 그 잠깐의 순간. 그리고 이면의 신이 그의 손을 잡을 이를 기다리는 그 날을, 아무도 알지 못하는 그 날을 스가와라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잠에서 깬 그의 눈에 비친 하늘은 붉었다. 흔들리던 나무는 멈춰서 있었다. 요리를 하던 어머니는 멈춰서 있었다. 스가와라는 그 기이한 상황에서 도망쳤다. 마을을 벗어나서 한참을 뛰어도 달라지지 않았다. 모든 사람은, 모든 짐승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모든 것은 멈춰서 있었다. 딱딱하게 얼어붙어있었다. 그 모든 것은 공포였다.

 

처음 신이 나타났다. 신은 그저 바라만보고 있었다. 그리고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스가와라는 맹목적으로 신을 향해 달렸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세상은 무서웠다. 혼자라는 것은 지독하게 외롭고 버거웠다. 그래서 바랐다. 구원을 처절하게 갈망했다. 그리고 신이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스가와라는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신에게 시험 당했다. 신이 항상 만들어놓는 함정에 걸려 벗어나고자 버둥거렸으며 그것은 그 이전에 함정에 걸렸던 자들과는 다른 태도였다. 그의 행동은 신의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구원받았다.

 

스가와라는 눈앞의 어린 귀족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떤 답을 내놓을까.

오이카와 토오루, 서쪽의 작은 귀족이여. 그대가 생각하는 강함이란 뭐지?”

오이카와는 멍하니 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키는 거. 지킬 수 있는 거.”

내게 소중한 사람을. 스가와라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는 오이카와가 삼킨 답을, 그리고 그의 기억 뒷면에 숨은 공포를 보았다.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것들을 두려워하는 작은 아이를 보았다.

그럼 너는 강하네.”

스가와라는 작게 웃었다. 도망친 그와는 달리 오이카와는 강했다. 공포에 져서 도망쳤을 뿐인 그와는 달랐다. 신은 그에게 말했다.

도망쳤으므로 너는 강하다.’

스가와라는 그 말을 오이카와에게 주기로 마음먹었다.

너는 외로운 상황에서도 앞으로 나아가니까 강하네. 나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서 전령을 보낼 거야. 너는,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사람에게는 문제가 없다고.”

오이카와의 눈에 스가와라가 빛나는 것 같았다. 반짝거리는 사람이었다. 오이카와는 홀린 듯이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

있잖아, 사람을 알아가는 데는 친구부터 시작하는 거래.”

?”

오이카와는 부드럽게 두근거리는 심장의 고동을 들으며 활짝 웃었다.

친구하자, 우리.”

기묘한 방향으로 튄 오이카와의 반응에 스가와라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이카와는 가늠할 수 없었다. 두근거리는 심장 속에 자리 잡은 이 고동이 어느 쪽으로 자라날지. 하지만 분명했다. 전령이 서쪽으로 떠나면 그는 돌아가야 할 터였다. 그리고 그와는 다시는 볼 일이 없으리라. 그러니까 잡아야 했다.

그래.”

 

토오루, 심장이 두근거리는 사람을 만난다면 꼭 잡으렴.’

심장은 지금도 두근거리는 걸요?’

호호, 우리 작은 아가. 엄마가 말하는 건 조금 다른 거란다.’

으응?’

다르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을 거야. 그 두근거림은.’

스가와라의 답에, 머릿속에서 속삭이는 저 먼 과거의 어머니의 말을 들으며 오이카와 토오루가 맑게 웃었다.

 

 

 

뭐 보고 있어, 토오루?”

스가와라는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는 오이카와를 조심스럽게 건드렸다.

저기! 저기 다 보이잖아, 스가쨩!”

? 무슨 소리야, 대체.”

내가 저기서 꼬맹이들 보면서 우울해 하는 거 다 봤지!!!”

, 옛날에 네가 여기 처음 왔을 때?”

꺄아악!”

듣기 싫다는 듯 비명을 지르며 귀를 막는 오이카와의 행동에 스가와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다 봤지. 여기서 조금만 마법을 써도 거기서 하는 말이 다 들!”

오이카와는 억울하다는 듯 스가와라를 노려보다가 결국 그의 입을 막기 위해 달려들었다. 이리저리 피하는 스가와라의 움직임에 잔뜩 뿔이 난 오이카와는 결국 덮치듯 스가와라를 강하게 붙잡고선 그의 입에 입을 맞췄다. 부드럽게 닿은 입술은 부끄러움이 녹아버릴 만큼 달콤했다.

댓글 로드 중…

트랙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URL을 배껴둬서 트랙백을 보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