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 연작형 커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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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겁게 달아올랐던 공기에 찬바람이 하나 둘 스며들기 시작했다. 불쾌감만 치솟던 습기도 어느 정도 가라앉고 숨쉬기 답답할 정도로 진득하던 공기가 조금씩 산뜻해지기 시작했다. 자비 없이 최저온도의 바람을 뿜어내던 에어컨은 어느덧 작동을 멈췄고 온 교실을 뒤덮고 있던 담요도 잠시 자취를 감췄다. 팔뚝에서 살랑거리던 와이셔츠는 어느덧 긴팔로 바뀌어 손목 근처에서 흔들렸다. 어느 순간 불쾌감만 더해가던 더위는 가시고 점점 더 많은 차가운 것들이 뜨겁기만 하던 바람 속에 스며들어 자리를 차기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ᑁ ❀ ᑄ
“아…. 학교 언제 마치지….”
에이미는 책상위에 아무렇게나 펼쳐진 문제집에 머리를 마구 문질렀다. 안 그래도 부스스한 연갈색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뻗치고 있었다.
“아직 반나절은 남았어, 포기해.”
가차 없는 짝의 말에 그녀는 흐어어, 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으며 발버둥 쳤다.
“이자기 보고 싶어…. 이자기가 부족해….”
하염없이 징징거리는 에이미에 그녀의 짝의 눈이 짜게 식었다. 그녀의 눈이 한심하다를 넘어 짜증으로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에이미는 열심히 발버둥을 칠뿐이었다. 그녀의 옆에 앉아 등교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 남자친구를 찾아대는 짝의 행각에 그녀는 결국 에이미의 머리를 꾹꾹 눌렀다.
“정 그러면 찾아가던가!”
그녀의 행각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반 아이들이 짝의 말에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듣는 에이미의 투정이지만 그들의 눈에는 남자 친구가 있는 자의 배부른 투정일 뿐이었으므로 짜증으로 일렁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안 돼. 우리 자기 공부해야해….”
웅얼거리는 말에 반 아이들이 쥐고 있던 물건들을 책상위에 내팽개쳤다. 그러면 찡찡대질 말던가!
“이자기이….”
커플 지옥 솔로 천국. 반 아이들은 물론 그녀의 짝까지 이를 으득 갈았다. 커플의 배부른 투정 따위 다 꺼져버려라. 그들은 그들의 앞에 놓인 문제집을 노려보다 전투적으로 문제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차마 에이미를 팰 수는 없으니 문제라도 조지겠다는 심정이었다.
ᑁ ❀ ᑄ
“야!! 오늘 오전만 한단다!”
교무실에 갔던 반장이 평소와는 달리 거칠게 앞문을 열고 소리 질렀다. 다른 반들도 지금 막 소식을 들었는지 방음 따위는 개나 줘버린 학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2학년들은 환호하다가 3학년들이 쓰는 바로 위에서 철철 흘러내리는 엄청난 환호에 괜히 숙연해졌다.
“근데 왜?”
주변은 온통 시끄럽건만 일순 조용해진 반이 어색해 누군가 먼저 입을 열어주기를 바라며 서로 눈치만 보던 와중에 누군가가 작게 물었다. 학교가 어떤 곳인가. 꼭두새벽부터 그들을 불러 맛대가리 없는 밥만 먹이면서 밤늦게까지 잡아두는 생지옥이 아닌가. 절대 하찮은 이유로 그들을 일찍 보내줄 리가 없었다. 그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속닥거렸다.
‘교장이 미쳤나?’
‘교장 출장이라며.’
‘그럼 교감?’
‘죽을 때가 됐나봐, 그 영감.’
선생님들이 들었다간 그 무슨 무례한 말이냐며 한소리 할 법한 추측들이 열심히 오가는 와중에 반장이 킬킬거리며 말했다.
“급식소 가스가 안 들어온대. 밥 못주니까 일찍 가락고 하는 거야.”
“!!!”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반장. 그럼 밥 안 먹고…, 그러니까 점심시간에 집에 가는 거야?”
“어. 4교시 끝나고 청소하고 집에 가.”
칠판에 일정을 적던 반장이 씨익 웃었다. 반장도 학생인터라 숨길 수 없는 행복과 즐거움이 맺힌 얼굴이 반짝거렸다.
“그래서 아까 2교시부터 계속 자습이였나봐.”
“와, 미친. 가스 고장 낸 사람 누구야. 진짜 사랑합니다.”
어른들이 들었으면 어이없어할 말을 조잘대며 다들 미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지금이 3교시고 곧 쉬는 시간 종이 칠 테니 대강 한 시간만 더 지나면 집에 가는 거였다.
모두의 얼굴이 반짝반짝 빛나는 와중에 에미이의 얼굴에 광이 철철 흘렀다. 등교야 등교시간이 같으니 같이 했지만 하교는 3학년과 2학년의 하교시간이 달라 같이 하기가 꽤 어려웠었다. 그녀는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3학년 반에 가기로 결심하며 분주하게 짐을 챙겼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그와 하교를 하고 싶었다. 반짝거리는 그녀의 얼굴에 에이미의 짝은 사자갈기처럼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매만져주었다. 저 꼴로 남자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덜렁대는 구석이 있으니 혹시 또 모를 일이었다.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는 짝의 손길에 에이미의 오묘한 호박색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같이 하교라니,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자기가 아무리 튕겨도 꼭 같이 하교해야지. 굳은 결심을 한 에이미가 콧노래를 부르며 다 챙긴 가방을 가방 거는 부분에 다시 걸었다.
‘일찍 마친 김에 데이트도 하자고 해야지.’
작고 귀여운 결심은 덤이었다.
ᑁ ❀ ᑄ
에이미의 발걸음이 통통 튀었다. 기쁨으로 반짝이는 얼굴에 햇살이 떨어져 부서졌다. 아이작은 ‘나 행복하오.’하고 온 세상에 광고하는 에이미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자기!!”
쉬는 시간 종이 울리기 무섭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교실 문이 열렸다.
“뭐야, 2학년?”
“이자기는 누군데?”
웅성거리는 급우들이 귀찮았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의자를 뒤로 조금 밀었지만 그새 반에 쏙 들어온 녀석은 그의 책상에 들러붙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뒤로 ‘이자기’가 자신이라는 걸 안 같은 반 녀석들이 와르륵 웃어대는 꼴이 보였다.
“왜?”
그는 그녀가 할 답이 짐작이 감에도 불구하고 물으며 덜 정리된 에이미의 귓가의 머리를 매만져주었다. 부스스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주제에 머리카락은 꽤나 부드러웠다.
“일찍 마치니까 같이 집에 가자!”
데이트도! 그는 예상과 한 치도 다르지 않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고2면 몰라도 고3이 일찍 마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이 기회에 같이 하교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무엇보다 그의 답에 화사하게 밝아지는 얼굴이, 뒤에서 경악하는 놈들을 지워버릴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넘어진다.”
아이작은 날 듯 걷다가 넘어질 뻔한 에이미를 붙잡았다.
“어!”
그가 잡아주자 마자 에이미는 두다다닥 길의 끄트머리로 달려갔다. 아이작은 텅 비어버린 손을 몇 번 움찔거리다가 그녀의 뒤를 쫓았다. 방금 넘어질 뻔 했는데 기운도 좋았다.
“이자기 닮았어…!!”
아이작은 그새 꽤 멀리 달려가 풀썩 주저앉아 버린 에이미를 겨우 따라잡자마자 들려오는 말에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이것 봐! 완전 자기 닮았어!”
고양이판 자기, 라며 잔뜩 흥분해 외치는 말에 그가 인상을 팍 구겼다. 이 지저분한 길거리 생명체의 어디가 자신과 닮았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대체 어디가 닮았다는 거야. 그리고 그거 놔. 무슨 병균이 있을 줄 알고 덥썩 덥썩 잡….”
“아니야! 이것 보라니까? 닮았다구!”
에이미가 불쑥 내민 고양이가 코앞에 있었다. 고양이의 눈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이 아주 잘 보였다. 대체 어디가 닮았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순순히 내려놓을 것 같지 않아 억지로라도 빼앗으려던 아이작은 에이미가 고양이와 뽀뽀를 하는 것을 보고 돌 마냥 멈춰 섰다.
“…너.”
“웅? 왜? 이자기도 뽀뽀해줄까?”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눈만 껌벅이는 꼴에 아이작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입이나 닦아.”
가차 없는 아이작의 말에 에이미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흥, 그럼 난 계속 이자기 고양이랑 뽀뽀할래.”
입술을 쭉 내밀고 고양이에게 들이대는 에이미의 꼴에 아이작은 인상을 쓰며 고양이를 빼앗아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꼬리를 살랑대며 바닥에 잘 착지한 고양이가 꼬리를 살랑대가 길 저편으로 사라졌다. 아이작은 주머니에서 꺼낸 수건으로 제 손을 벅벅 닦더니 다른 면으로 에이미의 얼굴을 부여잡고 박박 닦아댔다.
“으, 에! 아파!!”
“더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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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한적했다. 예상치 못한 사고로 일찍 마치는 바람에 아이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지만 다른 학교들은 정상수업을 하고 있었으므로 더 그랬다. 다른 학교도 다 등교할 즈음 등교하고, 학교가 마칠 즈음에는 다른 학교의 학생들까지 뒤섞여 인파로 북적이는 길을 걷는 것이 일상이었기에 이렇게 인적이 드물어진 거리는 익숙하지 않기도 했다.
더군다나 3학년이라는 이유로 학교에 잡혀 있던 그들은 온몸을 사로잡은 자유에 취해 주먹을 바르르 떨었다. 진짜 누군지는 몰라도 가스 망가뜨린 사람 3대가 홍복을 누릴 터였다. 그렇게 저들끼리 수군거리며 길을 걷던 일행 중 하나가 한적한 골목길 하나를 가리켰다.
“야, 저거 아이작 아니냐?”
“어, 맞네. 같이 가자고 하니까 들은 척도 안하더니.”
“미친, 너라면 너랑 같이 집에 가고 싶냐?”
“아, 쟤 아까 반에 왔던 애다.”
저들끼리 웅성거리던 그들은 아이작이 에이미의 손에서 고양이를 빼앗아드는 모습을 보며 기겁했다.
“헐, 미친.”
“아, 역시 꿈이지. 학교가 일찍 마칠 리가 없어.”
현실을 부정하는 사람부터 입을 틀어막고 홀린 듯이 그들을 보는 사람까지 다양하기도 한 반응이었다. 더군다나 아이작이 고양이를 내려놓고 에이미의 손을 잡아 닦아주는 모습에서는 너나 할 것 없이 뒷목까지 부여잡았다.
“미친! 저놈 내가 건네준 빗자루는 더럽다고 받지도 않았는데!”
“내 숙제파일은 불결하다고 받지도 않았다고!”
“난 오늘 오전에 쓰레기라는 소리 들었는데….”
저마다 ‘불결하다’거나 ‘더럽다’는 이유로 아이작에게 과제를 내거나 함께 청소하는 것을 거절당한 경험을 쏟아내는 와중에 누군가의 물기어린 중얼거림에 바로 입을 닫았다. 벌써 3년. 아이작과 더 오래 안 사람도 있지만 평균적으로 3년 동안 같은 교실을 썼는데 쓰레기라는 말을 안 들어본 사람이 누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