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ttle garden

신은 인간을 사랑한다. 투아데 다난을 사랑한 전장의 검은 까마귀여신은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는, 하지만 연약하기 짝이 없는 투아데 다난을 위하여 희생양을 만들었다. 별의 여행자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휘감고 목에는 영원히 부활하며 신이 사랑하는 이들의 낙원을 위하여 혐오 받고 무시당하며 경멸당하면서도 지키기 위하여 끝없이 생명을 바쳐야하는 밀레시안을.


*


흘러가는 바람에 남자의 금발 머리가 흩날렸다.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거슬린다는 듯 거칠게 쓸어 올린 남자가 슬쩍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옅은 하늘빛 눈동자에 비치는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하늘을 보던 그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눈에 거슬리는 것 하나, 동료하나, 그리고 오랫동안 눈여겨보고 있는 이, 한명. 한참동안 고요가 짙게 깔린 곳에 가만히 앉아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는 공기가 뒤틀림을 느끼곤 몸을 일으켰다. 하늘이 일그러지고 떨어진 거대한 것에 부드럽던 남자의 아미가 구겨졌다.

“이런. 아직 그녀는….”

남자의 목소리가 흉흉한 아래쪽의 공기에 휘말려 허공으로 흩어졌다.

“알터도 없으니 이벨린 혼자로는….”

남자는 홀로 중얼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팀의 일이지만 일단은 동료라는 이름으로 묶여있는 이이고 함께 있는 이는 그에게 있어서 꽤나 중요한 사람이었다.



“…피차 남 신경 쓸 여유는 없을 테니까요.”

가까이 접근하자마자 들리는 이벨린의 말에 남자가 가볍게 입을 열었다.

“흐음… 마음에도 없는 말은 그만 하는 것이 어떻겠나? 이벨린.”

“톨비쉬?”

경악을 담은 이벨린의 갈색 눈을 무시한 톨비쉬는 기르가쉬의 뒤에 숨어있는 것을 힐끗 보곤 말을 이었다.

“어차피 저 뒤에 숨어있는 저 녀석을 본 이상 물러날 생각은 없을 것 아닌가.”

톨비쉬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는 이벨린을 무시하며 검을 뽑아들었다. 힐끗 확인한 그녀의 얼굴에는 혼란이 맴돌고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내심 안도하며 톨비쉬는 전투에 집중했다. 그녀는 밀레시안이라고 하기에는 굉장히 약한 이였고 만에 하나라도 전투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예상보다 기르가쉬가 더 단단해 생각보다 오래 걸린 것을 확인한 톨비쉬가 검을 갈무리하며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알반 기사단의 일원인 톨비쉬라고 합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분을 직접 만나 뵙게 되니 솔직히 조금 떨리는군요. 부드럽지만 날카로운 기색에 그녀가 살짝 눈을 찌푸리며 이벨린을 힐끗 쳐다보았다. 둘 사이 이 상황이 약속된 것인가 눈을 굴리며 상황을 살피던 그녀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알고 있는 것과 알게 된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아는 것은 절대적인 힘이었다. 살짝 입술을 핥으며 머릿속을 정리하던 그녀에게 톨비쉬의 한마디가 가차 없이 떨어졌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이야기하죠. 저희 알반 기사단과 함께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상냥하고 나긋한 말에 거절을 입에 담으려던 그녀는 이어지는 그의 말에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그가 여기 있었다면 어땠을까. 의미 없는 물음을 주워 삼키던 그녀는 이어지는 톨비쉬의 설명에 고개를 돌렸다. 그의 설명과 말에는 틀린 것 하나 없었지만 자신은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을 터였다.


*


“톨비쉬, 당신은 그녀가 약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잖아.”

“…….”

답이 없는 톨비쉬에 발을 맞춰 걷던 이벨린이 버럭 성을 냈다. 그녀의 실종된 남편이라면 모를까 그녀는 반신화도 쓸 줄 모르는 나약한 밀레시안이었다. 제대로 전투를 하지 못하는 밀레시안은 이 전투에 조금의 도움도 되지 않을 텐데.

“톨비쉬!”

“쓸모없는 언쟁은 그만하죠, 이벨린. 상부에서 정한 일이니까요.”

이건. 톨비쉬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을 이벨린이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채로 입술을 꾹 깨무는 것을 무시한 톨비쉬는 가까이서 본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밀레시안들이야 특히나 개성적이고 인상적인, 혹은 괴악해 보이기까지 하는 외형들을 자랑하지만 그 사이에서도 그녀의 외모는 좋은 의미로 특출 났다. 남색의 짧은 머리카락과 사랑스럽게 처져 있는 강아지 귀,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계열의 색을 담은 빛나는 눈동자. 기사단원이라는 신분 때문에 외부인인 그녀에게 접근할 수 없어 멀리서 보거나 서류만 만나는 것이 다였지만……. 여하간 가까이에서 본 그녀는 여러모로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약해. 같은 밀레시안이라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이벨린의 말을 톨비쉬가 완고하게 잘라냈다.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모를까. 알반 기사단 내에서 톨비쉬 그보다 그녀를 더 잘 아는 이는 없을 거였다. 그녀가 남편이 실종된 후부터 남편을 대신해 온갖 일에 휘말렸다. 그럴 때마다 그녀가 무사히 그 일들을 헤쳐 나올 수 있도록 은근히 도움을 준 것이 바로 그였다. 그녀는 자신의 꼼수나 속임수로 일을 해결해왔다고 생각하겠지만 어디 밀레시안에게 떠넘겨지는 일들이 겨우 꼼수나 속임수로 해결될만한 일이던가. 톨비쉬는 언젠가 본, 일을 마친 그녀가 뿌듯하게 웃던 모습을 떠올리며 부드럽게 심장 위를 내리눌렀다. 정말이지 아름다운 여인. 사랑스러운 그녀의 남편은 대체 어디로 가버린 걸까. 이토록 나약하면서도 당당한 그녀를 두고. 이벨린은 설핏 톨비쉬의 눈에 스쳐지나가는 분노와 혐오에 가까운 감정을 외면했다.


*


그녀는 흘러내릴 일이 없는 땀을 닦아 내렸다. 이 ‘기사단의 일’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버거웠다. 안 그래도 통상적인 밀레시안보다 연약하기 그지없는 그녀인데다가 환생한지 얼마 되지 않아 가벼운 단련조차 부족한 상태의, 겨우 15살짜리의 몸으로는 더더욱 버거웠다.

“하아.”

겨우 마무리된 일에 그녀는 주르륵 바닥에 주저앉았다. 앉은 채로 일어나는 것조차도 버거운 숨을 토해내자 그녀를 돕던 톨비쉬가 뒷정리를 마치고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섰다.

“힘드신가요, 밀레시안 씨?”

“당연한 말을….”

그녀는 격렬한 전투를 치르고도 호흡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톨비쉬를 생경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난이 저 정도로 강할 수 있던가. 고민 속에 빠져들며 탁하게 흐려지는 그녀의 눈에 톨비쉬는 가볍게 몸을 풀었다. 보나마나 자신이 왜 이렇게 강한지 생각하고 있겠지. 톨비쉬는 감쪽같이 정리된 주변을 쭉 훑어보곤 곧게 몸을 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럼 잠시 쉬죠.”

톨비쉬의 말에 반응이 없는 그녀를 보며 톨비쉬는 겉으로는 보이지 않을 즐거운 미소를 머금었다.


*

“또 밀레시안님에 관한 보고서인가요?”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알터의 시선을 무시한 톨비쉬는 천천히 종이를 넘겼다. 시시콜콜한 것 하나까지 적힌 보고서를 음미하며 그녀의 발자취를 더듬던 톨비쉬는 또다시 이상한 일에 휘말린 것이 분명해 보이는 그녀의 움직임에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그녀의 남편의 일을 떠맡을 필요는 없을 텐데. 남편이 짊어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짊어지기엔 그녀는…. 서류를 서랍 속에 넣은 톨비쉬가 자리에서 일어나 무장을 확인하자 알터가 어딜 가는 거냐며 따라붙다 그를 찾아온 이벨린에게 끌려 사라졌다. 그러든 말든 나갈 준비를 마친 톨비쉬는 방금 봤던 이벨린의 다음 목적지와 그녀의 이동속도를 상기하며 빠르게 움직였다. 지금 그녀가 해결하려고 가는 곳은 생각보다 위험했기에.


*


완전히 마무리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소강상태에 접어든 상황을 되짚으며 톨비쉬는 조금 흘러내린 땀을 닦아냈다. 그녀가 해결하려고 애쓰는 모든 일들에 티가 나지 않게 조력하면서 여러 방면으로 더 강해졌지만 연이은 전투는 확실히 버거웠다.


“밀레시안 씨.”

톨비쉬는 날듯이 가벼운 목소리로 밀레시안을 불렀다. 바닥과 하나가 될 기세로 쓰러져 숨을 몰아쉬던 밀레시안의 눈이 데굴 굴러 그에게 닿았을 때, 톨비쉬는 조금만 움직이면 그녀와 닿을 정도로 가까이 와 있었다.

“밀레시안 씨, 당신은 말도 없이 사라진 ‘그’가 싫지 않나요?”

“안 싫은데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답에 톨비쉬는 튀어나오려는 마음을 깊이 밀어 넣었다. 자신이 그보다 더 당신을 보살필 수 있으며 그와는 달리 갑자기 사라지지도 않을 것인데…. 톨비쉬는 그녀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싫지 않다 하니 할 말이 없었다. 싫어하라고 할 수도 없었다. 미움 받고 싶지 않으니까. 그는 천천히 다음 기회를 기다리기로 마음먹으며 조금 긴장을 풀었다. 쉽게 포기할 수야 없지. 느긋한 미소를 지은 톨비쉬의 눈이 차분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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