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짙게 머금은 하늘에 느리게 구름이 흘러간다. 다 맞고 싶다는, 어쩌면 강박적인 생각과 뒤얽혔던 사각거리는 종이와 펜의 소음도 저만치 물러갔다. 혹여나 나도 모르는 사이 온갖 상념이 몰아쳐 실패할까 두려웠던 주행까지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낸, 두 손에 겨우 안착한 종잇조각과 작은 플라스틱 카드가 기묘했다. 기분 좋게 손안에 들린 것들이 지나가는 옅은 바람에 파르락 소리를 내어 느리게 그것을 꽉 붙잡았다. 의식적으로 합격 증서를 받아들고 나오며 들었던 사이좋던 부녀의 대화를 느리게 밀어내면서도 그것이 남기고 간 흔적을 더듬었다.
행여나 잃어버릴까 종이와 면허증을 바지런히 가방에 밀어 넣은 후에야 꺼낸 휴대폰을 켰을 때 보이는 것은 얼마 전을 기점으로 멈춰버린 대화여서, 별달리 나눌 대화가 있었던 게 아님에도 당신이 원망스러웠다. 지금 옆에 당신이 있었으면 했다. 빈 당신의 자리를 더듬거리며 완성해나가는 문장이 혹여나 당신이 내게서 멀어질 단초가 될까 두려웠다. 당신이 나를 떠나면 나는 참지 못할 거야. 휴식을, 달콤한 쉼을 제공하던 이 집은 불안으로 다시 가득 차올라서 내 목을 조르겠지. 조심스럽게 대화창을 쓸어내리며 완성했던 문장들을 지워 내렸다. 당신은 지금 뭘 하고 있어요? 비어있는 옆자리가 너무도 차갑다. 이걸로 당신에게 합당하게 옆자리를 청할 수 있을까. 답 없는 물음이 바작거리며 옆에 따라붙었다.
*
“하?”
“바다 보러 가요!”
“뭘로, 버스 타고?”
“운전해서!”
맑게 웃는 얼굴에 수현이 황당한 감정을 유감없이 흘려냈다. 그러던가 말든가 그런 그의 얼굴은 이미 질리도록 익숙한 여준은 더욱 반짝반짝 빛나며 수현을 바라보았다. 은근슬쩍 항상 수현이 약해지곤 하던 얼굴로 한참을 바라보며 소리 없이 졸랐다.
“하아, 나 장롱면허야.”
“저 면허 있어요!”
어제 보여드렸잖아요, 칭찬도 해줬으면서! 수현이 거의 다 넘어왔다는 생각에 잔뜩 들뜬 여준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차는.”
너 차 없잖아. 삐질 삐질 여준의 반짝이는 시선을 피한 수현이 겨우 핑계거리를 찾아 주워 삼키자 여준이 두 눈을 반짝이며 소리 높여 답했다.
“렌트해놨어요!”
저라도 당장 차를 사는 건 무리라니까요? 당연하다는 듯, 이미 수현의 거절은 계산해두지도 않았다는 듯 당당하게 말해오는 모습에 수현은 결국 허락을 내뱉고 말았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좋아 날뛰는 여준의 모습에 그저 웃어버리고 말았지만.
‘뭐…나쁘진 않겠지.’
방방 뛰며 온 집안을 헤집는 여준을 보던 수현이 문든 든 의문을 내뱉었다.
“그래서 언제 갈 건데?”
날뛰는 동안에도 기민하게 수현이 내뱉은 말을 잡아낸 여준이 씩 웃었다. 자못 불길하기까지 한 미소에 수현은 안경을 고처 써야 했지만.
“너무…빠르지 않냐?”
면허증을 땄으니 기념으로 드라이브를 가자는 말이 나오고, 허락을 주워 삼키고, 예정을 물어보곤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렌트해놨다는 차 앞에선 수현은 정말 기묘한 기분이었다. 이게 금전적 풍요의 차이에서 오는 시간 개념의 상실인가. 진지하게 고뇌하는 수현을 뒤로한 채, 한껏 들뜬 여준은 수현을 재촉할 뿐이었다.
“어서 타요!”
*
출발한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건만 수현은 벌써 몇 번이나 입 밖으로 뛰어나가려는 심장을 내리눌렀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처음 몇 번은 그래도 면허증에 잉크도 마르지 않았으니 거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수현은 안전대를 목숨이라고 착각한 것으로 보일 정도로 처절한 자세로 꽉 잡고 있었다. 미친놈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거친 운전에 행여나 혀를 씹을까 입조차 열 수 없던 수현은 결국 신호에 걸려 멈춰선 차를 몇 번이나 확인하곤 여준의 머리카락을 확 잡아챘다.
“너 면허 딴 거 맞아!?”
“힝, 왜 그래요.”
수현의 분노에 눈꼬리를 축 떨어트리곤 되묻는 여준의 모습에 수현은 말문이 막힌 듯 입만 뻐끔거렸다.
“너 면허증 땄다며! 그것도 만점이라며! 물론 세상사가 점수대로 되는 건 아니라지만 이건 너무했잖아!”
급발진이 어쩌고 브레이크가 어쩌고 잔소리를 퍼붓고 급기야 운전자를 바꾸자는 말까지 하려던 수현은 그사이 바뀐 신호에 여준이 물 만난 물고기마냥 거칠게 엑셀을 밟는 것에 입을 꾹 다물어야만 했다. 그의 혀는 소중했다. 거칠게 도로를 질주하는 차 안에서 수현은 그저 자신의 목숨이려니 하며 안전대를 꽉 쥐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
두 시간을 꼬박 달려서야 바다에 도착한 수현은 그사이 초췌해진 얼굴을 두 손으로 쓸어내렸다. 미쳤어. 둔탁하게 얼굴을 쓸고 지나가는 감각에 살아있음을 느끼던 수현이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차에서 내려 낭떠러지 위에 세워든 난간에 몸을 기대고 바다를 바라보는 여준이 눈에 들어왔다.
“좋다아!”
유난히 상쾌해 보이는 얼굴에 수현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점점 불안해져가던 여준의 모습은 그에게 퍽이나 무거운 짐이었으니까. 책임지기 버거운 부채. 이기적인 저를 쓸어내리던 수현은 그 잠깐 사이 코앞에 놓인 여준의 얼굴에 파득 놀라며 그 얼굴을 밀어냈다.
“뭐하는 거야.”
“바다 오니까 좋죠?”
“뭐라냐.”
방글방글 웃는 얼굴이 못내 부담스러워 슬쩍 여준을 밀어내고 난간 쪽으로 다가선 수현은 시야를 가득 메우는 푸른 바다에 넋을 놓았다. 사람을 압도하는 자연에 푹 빠져있는 수현의 옆에 슬그머니 다가 선 여준이 몇 번 소리 없이 입을 벙긋대다가 수현을 불렀다.
“형.”
“어?”
“좋아해요.”
“…뭐?”
“좋아해요, ‘여준’이 ‘남수현’을.”
순간 수현은 여준의 머리 위로 빛이 쏟아진다고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