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ttle garden

첫 마주침은 그저 사고였다. 지구를 지키는 사람과 사고에 휘말린 사람. 난데없이 허공에서 튀어나온 사람에 놀란 일반인과 어딘가에 떨어져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을지 모를 괴물을 사냥하러 온 사람. 당혹은 짧았고 놀람은 더 짧았으며 수용은 순식간이었고 대처는 더 빨랐다. 영어권이 아닌 나라에서 괴물을 찾을 생각을 하니 까마득했던 사람과 어쨌든 외국어를 잘하는 현지인. 신기한 존재에 기꺼이 도움을 주었고 까칠한 태도로 그 도움을 받아들인 사람.

 

동화 같은 만남이었고, 삼류 소설에서도 쓰지 않을 법한 진부한 시작이었다. 이것이 현실이며, 의외로 두 사람이 잘 맞았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수정의 입에서 더운 숨이 흘러내렸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그다지 좋지 않던 컨디션은 차라리 없다고 보는 게 좋을 정도로 나빠져 있었다. 생각하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라 수정은 벽에 몸을 기댔다. 도무지 공부라는 것을 할 만한 상태가 아님을 알아본 담임 선생님은 푹 쉬어라.’는 말만 하며 조퇴를 허락해주었다. 그것까지는 정말 좋았으나 문제는 다른 것이었다.

3학년은 조용한 곳에서 공부해야 한다며 하등 쓸모없는 배려로 6층에다 교실을 만들었고, 수정, 본인은 바로 그 3학년이었다. 그렇다고 1층까지 무사히 내려간다고 일이 끝나느냐 하면 그건 더더욱 아니었다. 차라리 계단을 내려가는 것이 편했을 만한 지옥이 그녀의 앞에 아가리를 벌리고 있을 예정이었다.

딱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수정은 더 계단을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아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복도는 고요했고 지끈거리는 머리는 이미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주저앉은 계단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냉기에 목구멍까지 서러움이 차올랐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조퇴하는 길마저도 이렇게 험난하다니! 수업 시간인지라 조용한 복도에 주저앉아 있던 수정은 결국 서러움이 폭발해버렸다.

안 그래도 아파서 서러워 죽겠는데 솟아나기 시작하는 눈물 때문에 더 서럽고 억울해서 수정은 동아줄처럼 꾹 잡고 있던 휴대폰을 열었다. 그리고 제일 먼저 보이는 사람을 꾹 눌렀다.

 

 

안 돼. 싫어.”

오랜만에 찾아온 여유에 지성인답게 독서를 위해 책을 펼친 스티븐은 눈앞에서 얼쩡거리는 망토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뭘 요구한 것도 아니지만 지금까지 저 망토와 함께 지낸 그의 경험이 말하고 있었다. 저걸 지금 봤다간 책이고 뭐고 없다고. 그는 굉장히 이성적인 사람이고 자신을 믿었으므로 그 경험의 경고를 무시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망토는 그의 앞을 얼쩡대다가 창가로 다가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는 창밖에 찾아든 가을 풍경을 무덤덤하게 힐끔 보곤 책장을 넘겼다. 팔랑거리며 넘어가는 책의 감촉이 퍽 마음에 들.

뭐야.”

망토로도 모자라 그의 달콤한 독서 시간을 방해하는 존재에 스티븐의 얼굴이 짜증으로 뒤덮였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울어대는 휴대폰을 향해 걸어가는 그의 걸음은 신경질로 가득했다.

, 수정?”

이글거리는 짜증에 거칠게 전화를 받은 그는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물기 어린 목소리에 얼빠진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수정을 오래 알아 온 것은 아니지만 한 사람을 알 정도로는 충분히 교류한 상태였다. 허공에서 튀어나온 사람에게 똑 부러지게 말하는 태도 하며 자신보다는 못하지만 팽팽 돌아가는 머리가 꽤 마음에 들었고 나이를 떠나 이것저것 터놓을 수 있는 좋은 대화상대였다. 그러니까,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울면서 전화를 걸 녀석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울음 섞인 목소리로 횡설수설하는 모양새에 그는 어느새 근처에 다가와 기웃거리는 망토를 착용하곤 게이트를 열었다.

 

안 그러던,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난리를 피우니 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

도대체가 자라나는 청소년을 이렇게나 혹사할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고, 그 수단이 공부라는 사실은 황당했다. 넘치는 건 부족한 것만 못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 아닌가. 대화하다 보면 상태가 영 안 좋을 때가 많은 수정이지만 가을의 일교차 때문에 몸의 균형이 망가진 상태에서 또 공부를 한다며 무리하니 그대로 퍼져버린 모양이었다.

반쯤 우는 모습으로 주저앉아 있던 수정을 생텀으로 데려온 그는 또 달래주자 서럽다고 우는 수정을 침대로 밀어 넣고 억지로 재웠다. 약도 중요하지만 일단 재운 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을 문제였으니까. 새근새근 잠든 수정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그는 괜히 자신도 졸려오는 기분에 몸을 돌렸다. 독서는 물 건너갔으니 잠이나 잘 생각이었다.

 

 

빌어먹을.

스티븐은 이를 꽉 물었다. 잠시 자는 도중에 생텀에 침입한 녀석은 꽤 까다로운 상대였다. 하필이면 잠이 조금 덜 깬 상태로 맞부딪힌 바람에 조금 손해를 본데다가 평소처럼 막 상대하려니 또 위에서 자는 수정이 생각나 그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 아슬아슬한 대치가 얼마나 이어졌을까. 난데없이 위에서 들려오는.

스티븐?”

목소리에 스티븐의 얼굴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구겨졌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그대로 지고 말 대치에 난데없이 튀어나온 꼬마가 순진한 얼굴로 갸웃대자 침입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 스티븐!”

아래에서 싸우고 있으면 피하든가 해야지 맹한 얼굴로 다시 저를 부르는 수정에 스티븐은 입술을 꽉 물었다. 이렇게 된 이상 빠르게 침입자를 제압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소극적으로 대응하던 스티븐이 공격적으로 나오자 수정을 노리던 침입자가 다시 그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쾅쾅거리며 뒤섞이는 두 사람에 수정은 발을 동동 구르며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괴물을 때려잡던 아저씨였으니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 아닌가. 난간 앞에서 왔다 갔다 하던 수정은 난간의 반대편, 그러니까 벽 쪽에 있는 장식품을 발견했다. 무거워 보이는 장식품과 난간 아래의 싸움판을 번갈아 힐끔거리던 그녀는 침을 꼴깍 삼키곤 슬금슬금 장식품 쪽으로 다가갔다.

혹시나 고정된 장식품은 아닌지 살살 살펴보고 톡톡 건드리던 그녀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에 히익, 하고 숨을 들이켜며 몸을 움츠렸다. 잠을 자서 조금 나아졌긴 하지만 여전히 상태가 나쁜 몸은 평소보다 더 빠르게 쿵쿵 뛰고 있었다. 수정은 조심스럽게 장식품을 품에 안아 들었다. 조금 무겁긴 했지만 영 못 들 정도는 아니었다. 조심하면서 난간으로 돌아온 수정은 장식품을 낑낑대며 난간 위로 올린 후 두 손으로 붙잡고 아래를 지켜보았다. 엎치락뒤치락하던 두 사람이 잠시 떨어진 순간 수정은 스티븐과 눈이 마주쳤다고 느꼈다.

!

스티븐이 난간 아래쪽으로 침입자를 쳐낸 순간, 수정은 있는 힘껏 장식품을 밀어냈다. 아슬아슬하게 난간에 걸려있던 것이 밀려 떨어지자 순간적으로 허전해진 두 손에서 위화감이 들었다. 둔탁한 소리가 몇 번 울리고 조용해진 생텀에 수정이 살짝 한쪽 눈을 뜨며 아래를 보자 침입자를 제압한 스티븐이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쉬라고 하지 않았나?”

아니, 그런 상황에 어떻게 들어가서 쉬어요! 나도 스티븐을 걱정한단 말이에요.”

우물거리는 수정에 스티븐은 할 말이 없어 한숨을 내쉬곤 침입자를 들어 올렸다.

알았다, 알았어. 잠시만 기다려라.”

제 걱정을 알아주지 않은 것에 심통이 났는지 뚱한 수정의 얼굴에 스티븐이 그녀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곤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금세 나타났다. 침입자는 어디로 치웠는지 텅 빈 손으로 돌아온 그는 수정을 그녀가 자고 있던 방으로 이끌었다.

좀 더 쉬어. 좀 괜찮아진 것 같으니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더 괜찮아져 있을 거다. 그러고 나면 집에 데려다주마.”

으음, 알았어요.”

나란히 두 사람이 위로 올라가자 어느새 스티븐에게서 떨어져 팔랑거리던 망토는 다시 창가로 들러붙었다.

 

생텀의 바깥, 9월의 뉴욕 풍경은 생텀 안의 소란과는 관계없이 완연한 가을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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