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세월을 세기도 어려울 정도로 먼 옛날, 아직은 <이능>이 온 세상에 고루 퍼져있던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특별한 종족을 만날 수 있다.온몸이 검은 종족부터 광활한 하늘을 누비던 종족까지. 그리고 먼 훗날, <화인>이라 불리게 될 이들까지도. 이 이야기는 바로 그 종족. 먼 훗날 <화인>이라는 이름으로 남게 될 그 종족의 어느 두 소년의 이야기다.
세상은 그저 홀로 존재하고 또 흘러간다. 그 흐름의 큰 가지를 조율하는 것은 <세계>. 세계는 그 흐름 속에서 생존에 실패한 것들은 가차 없이 잘라내고 살아남은 것들에게 다시 시험을 내린다.그 끝없는 흐름 속에서 살아남은 것은 <이능>을 받지 못해 죽음을 벗 삼아 치열하게 살아가던 <인간>과 <이능>을 지녔기에 현실에 안주한 나머지 세계에 의해 <삭제된 자>들의 이야기뿐이다. 지금부터 들려줄 이 이야기 또한 그 자취만을 남기는 것이 허락된 어느 가여운 이들의 이야기 중 하나다.
먼 훗날 꽃으로부터 비롯된 존재, <화인>이라고 칭해지는 이들의 본래의 이름은 <아우리아(Aurea)>. 몸속을 유영하는 붉은 액체를 가지고 있으나 그 액체가 공기와 닿으면 화려한 꽃잎으로 화하는 이들이었다. 그 수가 절대 변하지 않는 일족으로, 꽃을 기르고 다듬는 것에 특출난 종족으로 이름이 높던 그들에게 쌍생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누군가 죽으면 그의 이름을 이어받고, 그 시체에서 피어난 꽃들 사이로 죽은 이와 같은 이름을 이어받은 이가 태어났다. 전대의 살과 피로 이루어진 꽃밭은 가꾸며 다음 대를 위해 죽는 그들에게 있어 절대적인 질서를 흩트리는 쌍생이란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저주가 현실이 되었다.
늙은 아우리아가 대지에 몸을 뉘었다. 많은 아우리아들이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어 슬픔의 눈물을 흘렸다. 왜인지는 모르나 아우리아들의 마을 끝에 몸을 누인 그 노인은 아우리아들에게 미소 지었다.
“또…다시……만나…세…….”
더듬거리는 그러나 애틋한 그 목소리에 아우리아들이 울음을 삼켰다.
“후대…의…박하를…볼 수…있으면……좋을 터…….”
끝을 맺지 못한 그 음성에 아우리아들은 고개를 떨구었다. 결코, 만나지 못하리라. 후대는. 후대란- 죽어버린 전대의 사체에서 피어나니. 쭈글쭈글했던 노인의 살점이 빠르게 풍화했다. 일반적인 법칙을 거스른 그 속도에 맞춰 노인의 주변에서 박하들이 끝없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박하들이 노인을 모두 덮었을 즈음, 박하 더미가 볼록 솟으며 4개의 손이 박하 더미를 헤쳤다.
“4…4개?!”
처음 보는 그 기괴한 광경에 떠나보냄에 이어 다가오는 만남을 기다리던 아우리아들이 경악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박하더미에서 두 개의 얼굴이 솟아올랐다. 죽은 아우리아와 같은 연한 보라색 머리칼과 보랏빛 눈을 가진 두 명의 아이는 소름이 돋을 만큼 닮아있었다.
“싸……쌍생이다!!!!!!!!!”
어느 아우리아의 외침에 아우리아들이 파드득 물러섰다.
“아우?”
어린아이의 울음소리에도 아우리아들은 정신이 없었다. <정해진 숫자의 동족>과 살아가는 <변하지 않는> 아우리아에게 쌍생은 <깨져서는 안 되는 규칙을 부수는 저주>였다. 한참만의 소란 끝에 한 아우리아가 두 아이를 안아 들었다.
“피…피를 내어 봐요.”
아직 늦지 않았다고 중얼거리는 여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정상이 아니었다.
“둘 중 하나의 피만 박하로 피어난다면!!! <저주>가 아니에요!!! 누가 어서!!!!”
여인의 새된 외침에 한 남자가 꽃을 다듬는 칼을 가져와 두 아이의 팔을 그었다. 그리고……, 아우리아들이 바라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두 아이의 핏물이 공기와 마주치기 무섭게 피어나는 박하는 두 아이 모두가 박하의 아우리아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짧으나 긴 시간 동안 많은 아우리아들이 떠나갔고 태어났다. 그리고 그 중에 쌍생은 없었다. 아우리아들은 박하의 아우리아로 태어난 그들을 철저히 무시했고 잊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들은 새로이 태어나는 아우리아들에게 교육했다.
‘아우리아는 변하지 않는 수와 그 절대적인 규칙 속에서 살아간단다. 우리 아우리아의 숲 북쪽에는 가지 마렴. 그곳은 저주받았단다. 우리를-죽음으로 끌고 갈 거야. 우리는……변해서는 안 되는 일족이니까.’
태어남과 동시에 머리에 박힌 그 기억 속에서 아우리아들은 발버둥 쳤다. 그리고 불안과 공포로 무너지는 그들과 달리 아우리아의 숲 북쪽에서는 아주 평온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폴룩스! 폴룩스!”
아무도 걸음 하지 않는 숲에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아? 카스트로. 시끄러워. 소리 그만 지르라고.”
숲 안쪽에서 죽은 사슴을 끌고 나오던 소년이 숲이 떠나가라 소리치던 소년을 나무랐다. 연한 보랏빛 머리칼과 보랏빛 눈을 지닌 소년이 짜증이 가득 베여있는 몸놀림으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헤헤, 하지만 폴룩스, 이거 봐! 박하가 꽃이 피기 시작했어! 우리 피에서 나오는 것은 그저 꽃잎일 뿐이니까- 두근두근 하다고!”
폴룩스는 저와 똑같이 생긴 형제의 앞에 주저앉았다. 아우리아들의 꽃은 시기를 타지 않는다. 계절과 관계없이 아우리아 개개인의 능력과 자질에 따라 꽃이 피고 죽는다. 폴룩스의 눈이 그들이 머무는 곳의 끝자락에 닿았다.
‘지지 않는 박하. 전대의 무덤. 그리고 절대로 죽지 않는 것은 저것뿐이었다. 선대의 시체에서, 후대의 요람에서 피는 박하들. 번식도 하지 않으며 죽지도 시들지도 않는다. 마치 박제된 것처럼.’
“대단하네. 나는 아무런 힘도 없는데 말이지.”
“아냐! 폴룩스는 사냥 엄청나게 잘하잖아! 덕분에 우리도 살아가고 있고! 난 박하를 키우는 것밖에 못 하지만……. 아마 나도 도울 수 있을 거야. 조금만 더 있으면.”
활짝 웃는 카스트로를 보던 폴룩스가 웃었다.
“그래. 인간들은 박하를 약으로 쓰니까. 선대가 죽은 후로 박하는 여름에만 얻을 수 있어서 꽤 곤란해하더라. 분발해, 카스트로.”
“응!”
“후아-”
죽어가는 사슴의 곁에 주저앉은 폴룩스는 하늘을 바라봤다.
“미안하다. 하지만 포기해. <세계>는 변화에 뒤진 것을 용서하지 않아.”
폴룩스의 손이 닿은 곳에서 기괴한 꽃이 피어났다. 박하와 똑같은 색에 똑같은 모양새지만 박하의 향이 나지 않는 기묘한 박하. 그것을 뜯은 폴룩스가 사슴의 입가에 꽃을 가져갔다.
“아우리아들은 바보야. 나는 <정상적인 아우리아>가 아니야. 변종이지.”
박하의 유익한 성분이 뒤틀리고 또 뒤틀려 독이 되어버린 박하가 사슴을 순식간에 죽음으로 데려갔다.
“피가 공기와 만나 꽃이 되느냐로 동족인가를 판별하다니. 멍청하기 그지없어.”
‘<변하지 않는 종족>따위. 결국, 변화하지 못해 잘려나가고 말 거야. 아마…쌍생으로 태어난 우리가 그 시작이겠지. 처참하게 잘라내는 가지의 시작.’
죽은 사슴을 끌고 발을 옮기는 폴룩스의 뒷모습은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평온은 가차 없이 부서지고 만다. 평온은 언제나 부서지기 위해 존재하며 평온을 다시 만들기 위하여 피가 흐른다. <아우리아>의 끝도 그러했다.시작은 아주 작은 변종이었다. 만지는 순간 독이 올라 죽어버리는 새하얀 장미. 꽃을 청하러 온 남자에게 건네진 그 꽃은 남자의 연인을 살해했다.분노한 남자는 검을 들고 아우리아의 영역으로 침범했다. 비명을 내지르는 그 속에서 한 아우리아가 남자에게 외쳤다.
“저 숲 속!!!! 그곳에 <저주>가 있어!!!! 죄 없는 아우리아들을 죽이지 마!!!!!! 그 저주가 당신의 연인을 죽인 것이니까!!!!”
그것이 옳다는 듯 북쪽을 바라보는 아우리아들의 모습에 남자는 북쪽으로 달려갔다.
‘아우리아의 꽃은 <이능>이었다. 아우리아들의 <이능>은 사람을 해하지 않는다. 그 힘이 인간을 해했다면…….’
어리석고 바보 같은 생각이었지만 줄곧 존재해온 법칙에 얽매여 그들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었다.
숲 속은 한적했다. 아우리아들의 영역보다 더 평온한 그곳에서 남자는 <저주>를 찾아 헤맸다. 그리고 마침내 남자는 한 소년을 만났다. 소년의 손길이 지난 자리에 피어오르는 박하꽃. 그리고 그것을 먹자마자 죽어 나뒹구는 사슴. 그 사슴에 남자의 연인이 겹쳐졌다.
“너…구나!!!!!!!!!!!!!”
갑작스레 덮쳐오는 칼에 소년은 저항하지 못했다. 그리고……, 쏟아진 소년의 피는 순식간에 독을 품은 박하가 되어 남자를 덮쳤다.
“컥……크어…….”
비틀린 박하에 뒤덮여 남자가 절명한 후에도 소년은 고통에 몸부림쳤다. 강한 북풍이 소년의 꽃잎을 아우리아들의 영역까지 보내주었다.
“큭…크큭……”
가물가물거리는 시야에 소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멍청이들. 내 비틀린 꽃잎에 모두 죽겠군. 북풍이라 다행이다. 카스트로는 무사할 거야.’
소년의 숨이 끊어지자마자 순식간에 풍화가 시작되었다. 여느 아우리아들의 죽음이 그렇듯 박하가 소년의 위로 피어올랐다. 그리고 소년이 박하로 뒤덮인 후에도 후대는 태어나지 않았다.
오지 않는 형제가 걱정되어 숲을 헤매던 카스트로는 진한 박하향에 이끌려 발을 옮겼다. 아름다운 박하 더미 앞에 카스트로는 주저앉아버렸다.
“폴…룩스……?”
여느 아우리아들의 무덤이 그렇듯 작은 꽃밭이 만들어진 그 앞에서 카스트로는 주저앉아 버렸다.
“어째서…….”
카스트로가 폴룩스를 찾아 나설 무렵 아우리아들의 영역에 폴룩스의 꽃이 내려앉았다. 모든 것을 죽음으로 몰고 가며 느릿하게 박하 향을 뿜어내는 꽃잎에 아우리아들의 공포에 질렸다. 무덤이 형성되고 후대가 태어나야 하건만 박하의 꽃잎이 내려앉자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가장 오래된 아우리아가 그 광경을 보며 웃었다.
“천벌이다.”
노쇠하였으나 힘이 있는 그 목소리에 아우리아들이 그를 바라보았다.
“<세계>는 우리를 베어내기로 한 게야. 제 일족을 처음 난 쌍생이라는 이유로. 우리의 규칙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몰아낸 우리를 잘라내기로 한 게야.”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는 듯 꿈결과도 같이 부서지는 영역을 바라보며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그저…….
“미안하네……공포에 질려…그대의 후대를…보지 못하고 말았네…….”
그리고 마지막 폴룩스의 박하 꽃잎에 카스트로의 이마에 내려앉았다. 세계는 <이능을 지닌 가지 중 하나>를 성공적으로 잘라냈다.
아우리아가 멸족하고 난 후에도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그저 흘러가고 또 흘러갈 뿐이었고 순식간에 그들을 잊어갔다. 그리고……. 아우리아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북쪽 숲에는 끝없이 지고 피는, 그래서 지지 않는 거대한 박하군락지가 생겨났다. 그곳에 방문하는 이들은 누구나 슬피 우는 이들이었다. 무언가가 아프고 고통스러워 찾아오는 이들. 그리고 그곳의 박하 향은 평온을 나누어 죽고 있었다.
본디 아우리아들은 상냥하고 다정하다. 혹 누군가에게 꽃을 선물 할 때는 아우리아들을 찾아가 꽃을 청하라. 그들의 꽃은 참으로 아름답고 매혹적이라 그 선물이 거절당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주의하라. 그들은 지독히도 배타적이니. 그들의 꽃에 홀린 자는- 그 자신조차 그 배타적인 공기에 짓눌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