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ttle garden

[이와오이]사죄

2017. 1. 22. 23:04 - Liberia Logann

처음에는 악몽을 꾸고 괴로워하며 나에게 끝없이 용서를 비는 너를 보고도 믿지 못했다. 그저 땀으로 젖어가는 너를 깨우고, 벌벌 떨며 우는 너를 끌어안고 내 다리를 더듬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너를 그저 안아줄 뿐.

*



오이카와 토오루의 자살.

난데없이 날아온 붉은 연락이 내 머리 한켠을 망치로 때려 부숴버리는 것 같았다.

카라스노에 패배하고 마지막 전국행이 좌절된 후, 나는 계획대로 코트를 떠났다. 쓸쓸한 눈으로 비어버린 코트에 서있는 네가 걱정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남아있을 수도 없었다. 나는 오이카와 토오루, 네가 아니었기에. 그리고 스스로에게 약속했기에. 배구는 고등학교까지만 이라고. 무엇보다 오이카와는 나와 오랫동안 친구였던 만큼, 그리고 세터와 에이스라는 이름으로 묶여있었고 그에게는 새로운 에이스가 필요했다. 끝에 도달한 내가 아닌, 아직 더 나아갈 수 있는 에이스가.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사내는 천재는 아니지만 수재로 이름 높았다. 아니, 결국 천재에 무릎 꿇었으나 그가 가진 특유의 능력은 그를 찬란히 빛내고 있었다. 급조된 팀에 밀어 넣어도 그가 있는 팀은 한순간 유기적인 팀으로 변해버린다. 잘 다듬어진 팀에 밀어 넣으면 우시지마나 사쿠사, 혹은 키류 같이 천재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아니 오히려 부족한 놈들의 상대로 쉽게 지지 않는 팀으로 변해버린다. 공격이 되는, 쓸 만한 에이스가 있는 팀에 밀어 넣으면 그의 팀은 천재가 없어도 범인만으로 천재가 있는 팀을 짓밟을 수 있는 팀이 되어버린다. 그런 세터를, 심지어 서브 하나만큼은 탈고교급이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다는 세터를 놓칠 대학팀은 없었다. 우수한 세터자원이 있어도 탐이 나는 선수, 그게 바로 오이카와 토오루였다.

아오바죠사이에서 적어도 그가 기억하는 한, 추천으로 꽤나 이름난 대학에 들어간 녀석은 오이카와 토오루와 쿄타니 뿐이었다. 애초에 아오바죠사이는 유기적인 조직을 통해 상대를 압도하는 팀이었지 카라스노의 괴짜콤비나 시라토리자와의 우시지마처럼 한, 두 가지의 무기로 상대하는 팀이 아니었다. 당연히 대학 스카우터들이 침을 흘릴 선수가 있을 리가. 실제로도 아오바죠사이는 팀 자체가 매력적이지 선수 개개인이 매력적이라는 소리는 적은 편이었다.

마츠카와와 하나마키, 그리고 자신까지 셋에게 오이카와는 우리의 자랑거리였다. 덜떨어진 주장이라고 놀리고 구박했지만 그만큼 든든했던 사람이었다. 그 녀석외엔 다들 취미로만 하는 중이라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오이카와 토오루란 사내에게는 그들의 청춘이, 뜨겁게 타올라서 서슴없이 그들의 시간을 불태울 수 있던 시기가 잠들어있었다. 그래서 나는 충격 받았다.

과도한 연습으로 피곤해있던 상태로 당한 사고. 그 사고로 인한 무릎 부상. 무플을 되살리기 위한 수술 그리고 완치 불가 판정. 영원히 다리를 절어야 한다는 사망선언. 더는 코트 위에 서있을 수 없다는 압박과 생의 거의 모든 시간을 바쳐왔던 것을 잃었다는 허탈감. 부서진 다리를 가지고서라도 더 뛰고 싶은 욕망. 이와이즈미 하지메라는 사내는 너무도 쉽게 죽어버린 사내의 심정을 파악했다. 차라리 연습도중 부상이었다면, 아니 내가 적어도 그 녀석에게 붙어있었다면. 우글우글 모여든 동창들과 후배들, 그리고 이름 모를 이들이 뒤섞인 장레식장에서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무릎을 꿇었다. 나쁜 새끼. 언제나 든든하게 서서 수라 같던 시라토리자와 앞에서도 오연하게 저들을 다독이고 벼랑위로 내달리던 주장의 뒷목을 잡아채 잔뜩 훈수를 두던, 아버지와도 같은 무게를 가지고 있던 이가 무릎을 꿇고 오열하자 그를 지켜보고 있던 이들이 고개를 돌렸다. 침잠한 장례식장에 어울리지 않게 하얀색과 민트색이 어우러진 져지와 바지를 걸치고, 이제는 빛이 바래버린, 혹은 꽉 끼는 민트색 티를 입은 사내들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를 지켜보던 오이카와 여사, 죽은 이의 어머니는 결국 심장을 부여잡고 오열했다.

아들아, 사랑하는 아들아. 너를 위해 울어주는 이 많은 사람들을 두고 넌 어디로 갔느냐.

*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그의 침대에서 눈을 떴다. 장례식장과 그의 집은 거리가 멀었다. 미야기현이었다면 그의 방에서 눈을 뜬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겠지만 이곳은 그의 자취방이었다. 오이카와 토오루, 그 미련하기 그지없는 놈의 장례식장은 도쿄였다.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허탈한 웃음을 뱉어냈다.

불쾌한 악몽이었어. 그래, 그 오이카와 토오루 자식이 그렇게 죽을….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홀린 듯이 폰을 집어 들었다. 검은 액정 아래 작게 자리 잡은 버튼을 누르는 손이 선명하게 떨리고 있었다. 젠장. 입술에서 피맛이 날 정도로 짓씹은 사내가 거칠게 버튼을 눌렀다. 허탈할 정도로 경쾌하게 켜진 액정은 밋밋하기 그지없는 기본화면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 기본 화면 한가운데, 커다랗게 뜬 시계를 보던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X월 X일 밤 11시 즈음에 사고가 났단다. 너무 늦은 시간에 어둡기까지 해서 뺑소니 범은 찾지 못….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설명을 늘어놓던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달라붙었다. 지금 바로 달려가면 아슬아슬하게 오이카와의 학교에 도착할 수 있을 터였다. 온몸을 부여잡는 초조함에 이와이즈미는 연신 헛손질을 하고 분노를 토해내고 욕지기를 내뱉었다. 가까스로 나온 집밖에서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오늘따라 신호등이라는 신호등은 다 그를 멈춰 세웠다. 신칸센을 탈 수 있는 역까지 가는 버스는 그가 정류장에 도착하는 순간 떠났다. 가까스로 도착한 역에서도 방금 신칸센이 출발했다는 안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덜덜 떨리는 다리를 추스르며 의자에 앉았다. 흉흉한 그의 분위기에 아무도 근처에 앉지 않았지만 그에게 그를 배려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격렬하게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헉헉거리며 모퉁이를 돌았을 때,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아스팔트에 끌리는 고무타이어의 비명과 고통어린 신음을 내지르는 오이카와, 그리고 붉게 퍼지는 웅덩이가 들어왔다. 개 같은. 급하게 병원으로 옮겨진 오이카와의 상태는 이전과는 달랐다. 하지만 좋지도 않았다. 그는 강제로 은퇴해야했고 모두의 눈을 피해 결국 자살했다.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막지 못했다.

*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몇 번이고 침대에서 눈을 떴다. 그는 조금씩 빠르게 도착하고 있었다. 두 번째에는 도망가는 차의 꽁무니를, 세 번째에는 번호판을 봤지만 번호를 외우진 못했다. 네 번째에는 차의 번호를 확인했다. 눈이 돌아가 주먹을 휘둘러 벌금을 내기도 했다. 다섯 번째에는 오이카와가 치이는 순간을 확인했으며 여섯 번째는 오이카와를 부를 수 있었다. 일곱 번째에 와서야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오이카와를 구해냈다. 오이카와를 끌어안고 골목으로 나뒹군 후에야 차가 거칠게 아스팔트를 긁으며 전봇대에 부딪혓다.

이와쨩?

몇번 만인가, 이 얼마만인가. 귀에 들리는 오이카와 토오루의 목소리는 뇌가 새하얗게 타버릴 정도로 달콤했다. 저도 모르게 그 어깨를 부여잡고 입을 맞췄다. 죽지 않아서 다행이다, 오이카와.

오이카와 토오루는 난데없이 나타나 저를 끌어안고 구른 소꿉친구가, 다짜고짜 입을 맞춘 이와이즈미 하지메라는 사내가 퍽이나 기꺼웠다. 저 혼자만의 마음이라고, 더는 배구를 하지 않겠다, 그리 선언하고 떠나가는 이 남자의 등을 잡아채려는 것을 얼마나 억눌렀는가.

죽지라마, 쿠소카와.

응, 이와쨩.

*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당장 학교를 그만뒀다. 온 집안이 난리가 났지만 이와이즈미의 한마디에 가라앉았다. 하고 싶은 것을 찾았어요. 아들이 제 친구의 미래를 위해 한평생을 쏟아 부운 운동을 그만둔다는 것이 못내 슬프고 안쓰럽던 그의 부모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수로는 끝에 도달했기에 교육자를 목표로 다시 입시를 치르겠다는 단단한 눈에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어깨를 힘주어 잡았다. 믿는다. 그 천금과도 같은 말에 이와이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의 동거에 오이카와의 부모님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그의 아들은 배구에 지나치게 맹목적이라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배구는 그의 생명이었고 삶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와이즈미는 달랐다. 그는 유일하게 조금이라도 오이카와에게 간섭할 수 있는 남자였다. 그렇게 모든 것은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았다. 이와이즈미 하지메, 이 건강 빼면 시체인 남자가 악몽을 꾸며 일어나기 전까지는.

오이카와 토오루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친구가 구한 다리였다. 믿을 수 없기도 했다. 그의 손에 억지로 끌려간 병원에서 의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었다.

친구분께 감사하십시오, 환자분. 극도로 혹사된 다리가 아슬아슬해요. 만약 여기서 어디 심하게 부딪히기라고 했다면 선수 생활은 끝입니다.

그 단호한 선언에 오이카와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친구가, 친애하는 이와이즈미 하지메라는 사내가 그의 삶을, 평생을 구했다. 그런데 너는 왜 나에게 잘못은 비는가. 오이카와 토오루는 헐떡이며 비는, 처절하게 용서를 구하는 잠든 연인의 머리카락을 쓸어주다 그를 깨웠다. 일어나, 하지메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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