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이의 인연은 우연에서 태어난다. 그러면 그 우연은 도대체 어디에서 태어나는 걸까. 만약에, 아주 만약에 순간과 순간이 겹치고 거기에 아주 작은 행운이 깃들어서 너와 마주친 그 것이 우연이 태어난 것이라면. 나는 그 순간과 순간의 마주침에 감사할거야. 나에게 너를 알려주고 내가 이렇게 행복할 순간을 그려낼 수 있게 만들어준 그 마주침에 말이야.
거울 속에 비친 소녀의 모습은 완벽했다. 열심히 관리해준 것이 티가 나는 허리까지 길게 내려와 찰랑거리는 갈색 긴 생머리와 부드럽게 휘어진 강아지 같은 눈매. 새 학기이니만큼 깨끗하게 빨아서 빳빳하게 다린 교복까지. 벌써 3년째 입는 교복이 새롭게 다가올 리가 없건마는 새 학기라는 한마디로 모든 것이 새롭고 두근거렸다. 얼마나 거울 앞에서 모습을 확인하고 가방에 연신 물건을 넣었다 뺐다 했던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소녀는 연신 매만지던 외모고 뭐고 다 뒤로 미뤄둔 채 가방을 들고 집을 뛰쳐나오고 말았더랬다.
다행스럽게도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학교는 아직 아이들로 어수선했다. 누가 담임이 될지 모르지만 일단 자리는 좋은 곳에 앉는 것이 좋은데…아까워. 소녀는 슬금슬금 뺨을 긁으며 뛰어오느라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매만졌다. 벽에 붙어있던 반 배정표 앞은 꽤나 한산해서 소녀는 그리 노력하지 않고도 반을 확인하곤 건물 쪽으로 발을 옮겼다.
“어….”
아카아시는 건물 쪽으로 사라지는 갈색 머리카락의 잔상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아카아시!”
밝다 못해 하늘을 뚫을 기세의 보쿠토가 후다닥 뛰어와 그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아카아시, 몇 반이야!”
“아, 아직 확인 못 했습니다.”
“나는…!”
아카아시는 표를 훑어 내리며 자신의 이름을 찾으며 보쿠토의 목소리를 의식 저편으로 밀어냈다. 그의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그의 반도, 보쿠토의 반도 아닌 스쳐지나간 그녀의 잔상이었으니까.
“다들 서로 질릴 대로 봤지?”
“네에!”
학원이다 보니 에스컬레이터 식으로 올라오면서, 그게 아니라도 3년이나 봤으면 대강 같은 학년의 얼굴정도는 외우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어쩌겠냐? 나는 너네 모른다. 자기소개 해라.”
거기 창가 맨 앞에서부터 이렇게. 대충 손을 휘적거리면서 순서를 설명한 담임 선생님이 교탁에 몸을 기대서서는 출석부를 펴들었다. 한 명 한 명 자기소개를 해나가는 것을 듣던 래비는 벌떡 일어서서는 귀가 떨어져나갈 정도로 소리치는 소년을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Hey, hey, hey!! 배구부 부장 보쿠토 코타로 입니다!”
밝다 못해 유쾌하기까지 한 자기소개가 끝나자 담임 선생님은 허허롭게 웃었다.
“기운 한번 좋다. 그래, 다음.”
그 뒤로 이어진 자기소개는 지나치게 임팩트가 강한 소개를 들은 뒤라 그런지 다들 밋밋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분위기에 편승해 이름만 말하고 빠르게 자리에 앉은 래비는 곁에 앉은 여자애와 작게 수다 떨기 바빴다.
생각보다 그 소년은 매우 유쾌하고 사고뭉치였다. 하지만 좋은 사람. 1년 동안 서로 한 번씩은 짝을 해봐야하지 않겠느냐는 담임 선생님의 주장아래 정해진 규칙에 따라 새로운 짝을 만난 날, 래비는 그렇게 생각했다. 생각 외로 꽤나 죽도 잘 맞았다. 반 아이들은 유쾌한 사람들끼리 만났다며 웃곤 했다. 실제로도 겨우 2주, 정말 짧은 시간이었는데도 마음도 잘 맞고 친해져 수업시간에 서로 키득거리다 뒤로 나가 벌을 받기도 했다. 평범하디 평범한 그 일상 속에서 절대 평행선을 그릴리 없던 순간과 순간이 마주쳤다.
“보쿠토 상.”
“오우! 아카아시! 무슨 일이야?”
머리를 맞대고 숙제를 해치우던 와중에 누군가가 보쿠토를 불렀다. 고개를 든 래비는 시야를 메우는 새까만 머리카락과 나른한 것 같은 눈의 소년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아, 그러니까….”
멍하니 바라보는 눈길이 거슬렸을까, 얼굴을 살짝 돌려 래비를 정확하게 바라본 소년은 슬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곤 보쿠토에게 뭔가를 계속 설명했다. 꽤나 길어지는 대화에 펜을 놓고 둘을 구경하던 래비는 갑작스런 보쿠토의 부름에 놀라 흠칫하다 의자가 뒤로 넘어질 뻔 했다.
“괜찮으십니까?”
“아, 응.”
고, 고마워.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내뱉은 감사인사에 소년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 래비! 아카아시야! 우리 세터!”
그게 첫 만남이었다. 순간과 순간이 마주한, 우연에 가까운. 그 뒤로 생각 외로 마주칠 일이 많았다. 친해진 보쿠토를 따라 배구부 구경을 간다던가, 보쿠토가 친 사고를 수습하러 아카아시가 반에 들린다던가. 항상 투닥거리며 놀고 있는 보쿠토와 저를 바라보다 가는 소년의 등을 래비는 항상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냥 좋은 후배. 보쿠토를 잘 챙기는 착한 후배 정도이던 소년에게 보내는 시선에 다른 감정이 스며들 즈음에는 여름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래비! 그냥 우리 배구부 해!”
“엑?! 3학년 여름에 부슨 부활동이야?!”
옷을 갈아입고 온 아카아시는 아직도 투닥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그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보쿠토 상, 일단 옷 갈아입고 오세요.”
“앗, 응!”
후다닥 달려가는 보쿠토를 확인한 아카아시는 작게 한숨 쉬며 래비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좋아합니다.”
“어?”
“방학이 되면 더 보기 힘들어질 테니까요…. 더 늦기 전에 말하고 싶었습니다.”
귓가가 붉게 물든 아카아시를 보며 래비는 자신이 해야 할 답을 본능적으로 찾아냈다.
“나도, 나도 좋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