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밤길을 거닐던 아리엘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근래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며 늦은 시간의 외출은 위험하다고 경고하던 텔레비전의 어느 프로그램이 기억났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낮의 활기로 가득 차있던 거리가 밤에 눌려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반짝이는 달빛을 받으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가만히 밤하늘을 바라보던 그녀는, 정말 우연히, 의도치 않게 ‘무언가’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것은 일종의 기적과도 같은 만남이었다. 아리엘은 그녀의 시야에 의도치 않게 담긴 무언가를 가만히 바라보며 아주 느리고 평범하게 눈을 깜박였다.
훗날 상기하건데, 그것은 운명과도 같았다.
✴
“메카트론.”
- 뭐지.
언제나와 같이 퉁명스런 그의 대꾸에도 아리엘은 실망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답이 언제나 그러함을 알고 있었으며, 겉과 속이 똑같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결코 온화한 성정이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는 그녀에게는 대단히 말랑거리는 편이었으므로.
“요즘 시끄럽다는 의문의 일당들이 너희야?”
그의 부하를 타고 다녀온 샌드위치 가게에서 사온 샌드위치의 포장을 벗기며 여상스럽게 묻는 아리엘에 메카트론은 잠시간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조막만한 인간은 그가 짓누르면 그대로 터져나갈 정도로 작고 연약했지만 그럴 생각은 들지 않았다.
왜일까.
메카트론은 요 근래 자신의 성정이 기묘할 정도로 평온하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물론 이 조그만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일이었지만.
- …왜 그러지?
메카트론은 문득 그녀가 그를 무서워하는 것을 상상했다. 꽤나 불쾌하고도 짜증스런 감정이 치밀었지만 메카트론은 그것을 표출해내지는 않았다. 그는 공포를 휘두르는 법을 대단히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것이 그리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사실도 쉽게 짐작해냈다.
“딱히 뭘 하겠다는 건 아니고….”
거기까지 말한 아리엘이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리는 소스를 급하게 핥아먹었다. 꽤나 큰 것을 사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몇 마디의 대화를 나누는 사이 먹어치운 그녀에 메카트론은 그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녀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물론 그에게는 ‘기다린다.’는 이 행위마저도 새롭고 기묘했다.
“그냥 궁금하니까.”
시끄럽거든 요새. 남은 샌드위치를 크게 베어 물며 답하는 그녀의 말에 메카트론은 잠시 고민했다. 그가 진실을 알려주었을 때, 과연 그녀는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탁탁거리는 소리가 나게 손가락으로 무릎부분을 두드리던 그가 천천히, 하지만 너무 느리지도 않게 물었다.
- 그렇다면…?
“웅?”
메카트론의 되물음에 샌드위치의 마지막 조각을 입속에 막 던져 넣었던 아리엘이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뺨을 하곤 그를 올려다보았다. 잠시 그렇게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아리엘이 느리게 입안의 샌드위치를 씹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줄어드는 그녀의 뺨을 가만히 바라보던 메카트론은 이 순간이 끝나 그녀가 답하기를 바라면서도, 그녀가 영원히 샌드위치를 씹고 있길 바라는 그의 속에 조금 당황했다.
“…뭐가 그렇다면, 인데?”
다 씹은 샌드위치를 삼키느라 울렁인 그녀의 목을 지켜보던 메카트론이 그녀의 물음에 다시 한번 답해주었다. 메카트론은 문득, 이런 행동도 그녀에 한한 일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 내가 그 소란의 원인이라면, 어쩔 거지?
“별로?”
한쪽 눈만 찡그린 채로 고개를 갸웃하는 그녀의 모습에 메카트론은 속에서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던 무언가가 맥없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 하?
“진짜 별 생각 없는데. 그냥 시끄러우니까 물어본 거고. 너가 날 죽일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야.”
죽일 거라면 이렇게 모셔다주고 모셔오고 하진 않겠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아리엘이 샌드위치 포장지를 주섬주섬 주워모아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그러니까 쓸모 없는 생각 하지 말라고.”
씨익 웃는 아리엘의 얼굴에 메카트론은 정말 허탈해져서 허허로이 웃었다. 첫 만남에서,
‘네 이름은 뭐야?’
라고 물어오던 소녀는 정말이지 언제나 그의 상상을 뛰어넘는 독특함을 가지고 있었다. 메카트론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뺨에 입을 맞추더니 그에게 기대 잠든 여인의 머리를 손가락 하나로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
샘은 손에 들고 있던 샌드위치 봉투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 맙소사….’
그는 공원 밖에 있어 그가 부르면 얼마든지 달려올 수 있는 범블비를 부른다든가 하는 생각도 하지도 못한 채로 넋을 잃고 서 있었다. 샘의 눈에는 메카트론과 일상적이라는 듯 대화를 나누는 여자만이 보였다. 인류를 말살하겠다는 놈과 어떻게 대화를 저렇게 나눌 수 있는지 그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삐죽빼죽 솟던 그의 생각은 엉망으로 뒤엉키고 얽혀서 풀 수조차 없었다. 혹시 본인이 오토봇과 메카트론을 착각하고 있는 것이고, 그녀와 대화를 하고 있는 ‘저 존재’가 메카트론이 아닌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한 샘은 고개를 강하게 털어냈다.
‘속고 있는 거야.’
아리엘은 언제나 그랬듯 느긋하게 거리를 거닐었다. 메카트론은 뭐가 그렇게 바쁜지 요 며칠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상태였다. 꽤나 친밀해지고 중요해진 이의 부재에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쉬다가 뒤에서 느껴지는 발걸음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
“저기요.”
샘은 며칠간 지켜본 그대로 움직이는 모습에 아리엘을 붙잡았다. 그의 부름에 몸을 돌린 여자는 무심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 이…메카트론을 만나는 걸 봤어요.”
잔뜩 긴장한 샘은 대뜸 직구부터 토해냈다. 남들 모르게, 평범한 차로 변장해서 지켜보고 있던 오토봇들은 옅게 신음했다. 간밤에 옵티머스 프라임의 눈을 피해 열심히 외웠던 말들은 어디로 갔는지….
“악당이라고요! 인류의 말살을….”
샘의 말에 대꾸하나 하지 않고 인상을 찌푸린 아리엘은 몸을 훽 돌리고 공원 깊은 곳으로 발을 옮겼다. 악당, 악당, 악당. 그게 다 무어란 말인가.
아리엘은 깊은숨을 토해내며 그녀가 머무는, 산과 공원이 으슥하게 만나서 아무도 오지 않는 곳까지 가 변신을 조금 풀었다. 완전히 풀면 덩치가 덩치다 보니 일반 인간들도 알게 될 거라 뿔과 날개를 꺼내는 선에서 해방감을 만끽하던 아리엘은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몸을 돌렸다.
“뭐….”
- 드레곤….
아리엘은 말허리를 싹둑 자르고 들어온, ‘인류의 편’이라 불리는 존재의 거체에 인상을 구겼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하나같이 무례하고….
- 도와주게.
난데없는 말에 아리엘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인상을 찌푸렸다. 줄기줄기 새어 나오는 위압감에 옵티머스는 침착하게 그녀의 답을 기다렸다.
“싫어. 나는 두 쪽 모두 도울 생각이 없어. 나는 중립적인 존재야. 귀찮게 하지마.”
딱 잘라내 버리는 그녀의 모습에 옵티머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쓸모없이 참견해대는 이들 때문에 짜증으로 가득 찬 아리엘은 거칠게 몸을 돌렸다. 그녀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찰나의 순간 번개같이 움직인 옵티머스가 그녀를 뒷목을 후려쳐 기절시켜버렸다. 잠시 후 자리를 벗어나는 옵티머스의 품에 안긴 아리엘은 뿔도, 날개도 사라진 상태였다.
뒤늦게 아리엘을 만나러 온 메카트론은 긴 숨을 내쉬었다.
- 후….
엉망으로 뒤집어진, 아리엘의 거처의 상태에 그는 가만히 이를 갈았다. 그의 뒤를 따르던 부하들이 그의 위압에 짓눌려 바들바들 떨어대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쿵, 하고 내딛는 메카트론의 걸음마다 짙은 분노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앞서 나가는 지도자의 걸음에 그의 부하들이 허겁지겁 달라붙었다.
✴
아리엘은 눈앞의 남자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무기질의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 같은 아리엘의 시선에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제대로 협….”
쾅! 심문에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아리엘에 남자가 화를 내려는 순간, 차가 급격하게 흔들렸다. 그는 빠르게 차고 있던 무전기를 꺼내 외부의 상황을 확인하려고 했지만, 그의 행동보다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공격에 옵티머스가 차량의 형태를 유지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더 빨랐다. 자연스럽게 차량 내부에서 밖으로 튕겨지듯 나온 남자가 아리엘을 부여잡았다.
- 아리엘.
귓가에 들려오는 익숙한 부름에 무표정하던 아리엘의 얼굴이 미미한 온기가 돌았다.
“응.”
- 구해주겠다.
옵티머스는 메카트론의 말에 자신이 악당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떨쳐내지 못했다. 쏟아지는 디셉티콘을 막아섰다. 수월하게 오토봇들을 압도하는 것 같던 디셉티콘은 앞서 나가고 있던 오토봇들이 합류하자 급격하게 전세가 밀리기 시작했다. 옵티머스와 맞붙은 메카트론은 아직 만전을 갖추지 못한 상태인 건지 밀리기 시작했다.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아리엘은 메카트론의 한쪽 팔이 너덜거리는 순간 기다리는 것을 포기했다. 순식간에 그녀의 머리 위로 뿔이 솟아오르고 등에 날개가 펼쳐졌다. 우득,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를 구속하고 있던 것이 망가지고 그녀를 부여잡고 있던 남자가 튕기듯 나가떨어졌다. 허공으로 뛰어오른 그녀의 몸이 순식간에 드레곤으로 화하며 메카트론의 팔을 완전히 뜯어내려는 옵티머스를 쳐냈다.
발로 단단히 자신의 멀쩡한 팔을 부여잡는 드레곤의 모습에 메카트론이 신경질을 냈다.
- 내가 구해줄 수 있었다.
아리엘은 메카트론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날개를 움직였다. 허공에 떠올라 이동하기 시작하는 아리엘과 메카트론을 쫓을 방법이 없는 오토봇들은 그것을 허망하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알아. 근데 내가 답답해서.”
구하는 건 내 마음이지. 웅웅거리며 흘러나오는 아리엘의 말에 메카트론은 헛웃음을 토해냈다. 아리엘은 문득 올려다본 어둑한 밤하늘은 언제나 같다고 생각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지러지고 차오르는 달빛은 언제나 고요했으며, 그 옆에서 빛나는 별들도 같았다. 다만 그 아래를 흘러가는 밤에 물든 구름만이 종종대며 급히 발을 놀릴 뿐이었다. 해서 느긋이 흐르는 세월에 발맞추어 움직이는 밤하늘은 언제나 조용하면서도 번잡하게 빛났다.
“정말 정신없는 하루네.”
- 나만 할까.
언제나처럼 가볍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아리엘과 메카트론은 허공을 가로질렀다.